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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me Nov 30. 2022

조등이 된 은행나무

  영안실을 찾아가는 길이 퍽이나 멀었다길가에 늘어선 은행나무는 온통 샛노란 색을 띠고 있었다은행나무가 조등弔燈을 대신하는가. 조등에 비껴 든 하늘은 잿빛이었다그녀의 슬픔과는 무관한 듯이 잿빛 하늘과 노란빛검은 상복의 빛깔이 저들끼리 어울려 묘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문득 한 남자가 걸어온 길이  은행나무 사이로 사라져 가는 양 나뭇잎이 빛에 흔들렸다

  입관실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통곡소리로 가득했다입관실 유리창 밖으로는 몇몇의 그림자가 서성였고이미 곡에 지친 상주들의 목소리가 울음을 삼키려는 듯 간헐적으로 이어졌다연도를 바치는 사람들의 애조 띤 곡조는 사뭇 경건하였다그리고 그 사람들의 손 안에서는 묵주 알이 바쁘게 돌려지고 있었다.

  몇 달 전이었다그녀는 이제껏 남편과 악만 퍼붓고 살아왔다고 토로했었다결혼 생활 30년의 반을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방을 써왔다고 말했다남편도 그 세월의 절반을 버텨내느라 지쳤을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그녀의 잦아든 말소리의 여운은 마치 단조의 타령과 흡사했다남편의 발병 이후 두 해가 그나마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는 시간이었다고 혼잣말처럼 진술하였다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어서 화가 치밀었으나 남편의 병세가 다급해지자, 10년 만아니 7년 만나중에는 5년 만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줄여보았지만 그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입관실의 침묵을 깨고 연도 소리와 성가가 구슬프게 들려오기 시작했다고인의 시신이 냉동실에서 드르륵 밀려 나왔다. 하얀 시트가 젖혀지고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그녀의 남편이 유리창 밖으로 보였다입관식이 진행되는 사이 그녀 폐부 깊숙이 묻혀 있던 회한이 터져 나온 것일까그녀는 끝내 분노를 삭이지 못하였다그녀는 입관실 창을 들여다보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이내 웃기는 짓들 그만두라며 성난 얼굴로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렸다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외침이다가족들의 만류로 창이 깨질 듯 한 두드림은 멈추었다급기야 그녀는 혼자 버둥대던 몸을 맨바닥에 놓아버렸다몸은 뻣뻣해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눈빛도 얼굴도 이미 내가 알던 평상시의 모습이 아니었다아들이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부둥켜안았지만 소용없었다아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입관식은 잠시 중단되었다그리고 끝내 그녀 없이 입관식이 치러졌다

  쓰러진 그녀를 간신히 휠체어에 태우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넋이 나간 채 간간히 할렐루야를 외쳤다나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문득 시선을 돌렸을 때건너편 언덕배기에 말라가고 있는 토끼풀 밭이 내 눈에 들어왔다수많은 이파리 속에서 행운의 네 잎 찾기는 버릇처럼 해온 일이었다널려진 행복 속에서 행운을 찾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듯이 잎들은 이미 기운을 잃었다그 일에 몰두했던 시간들마저 마른 잎처럼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한평생 같이 살아가는 동안 등을 기댈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행운이었을까가을을 타고 있는 토끼풀 무더기는 여전히 동그란 꽃을 피워 올리려 힘쓰며 언덕을 다시 하얗게 채울 것이다그녀의 빈 가슴에도 그 꽃대가 하얗고도 붉게 피어오르길 바라며 휠체어를 붙든 내 손에 힘을 주었다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주듯이 손잡이를 꼭 쥐었다


  며칠 후 그녀 집을 방문했을 때살던 집을 줄여가야 할 때의 집을 파는 시기며새 집 고르는 방법 등자신의 사후에 관공서 일을 보는 요령까지 깨알같이 기록해 놓은 남편의 수첩을 그녀가 내밀었다남편의 땀을 닦아내던 낡은 수건이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었다남이 보기에 꼬질꼬질하다며 그녀가 그 수건을 얼른 뒤로 감추었다남편의 냄새가 날아갈까 봐 그 수건을 차마 빨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남편은 고작 냄새로 남았고그녀는 그 냄새를 지키고 있었다이제 남은 일은 생활 법률서 같은 남편의 수첩을 들고남편 명의로 된 소유물의 이름을 지우러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꽃이 먼저 피는 나무는 그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제대로 보인다얼키설키 있을 때는 가지의 흠도 잘 보이지 않는다그를 떠나보내고 난 후, ‘생이 다할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는 한 마디만이라도 그에게 전달되기를 원한다고 그녀가 고해하듯 말했다그의 빈자리에 돋아날 아픔을 못다 한 사랑으로 채우겠다는 다짐일 것이다이 세상에는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왜 이리 많은가


  하늘을 찢을 듯한 비행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려본다제트기가 지나간 하늘에 구름 터널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그곳의 끝에는 분명천국으로 가는 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산야는 붉게 물든 나뭇잎으로 훨훨 타오르고 구름 터널이 서서히 흩어져 하늘이 온통 뿌옇다그가 돌아갈 천국 문은 어디쯤 있는 것일까남은 사람들의 그림자를 뒤로하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구불구불 오르는 산등성이에는 금빛 홍빛 단풍이 도열해 있었다弔燈이 된 은행나무도 질펀하게 산중을 밝혔다그 나무 등불이 해마다 그녀가 살아갈 길을 남편처럼 환히 비춰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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