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깃불이 자주 나가던 때가 있었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불이 나가는 순간 방안은 어둠에 갇히고 바깥은 소란해진다. 아버지는 자리에 가만히들 있으라고 우리에게 이르신 다음, 더듬더듬하여 찾아온 막대 초에 불을 붙이셨다.
아버지가 불 붙인 촛불 한 자루를 밥상 위에서 거꾸로 들면 미끄덩한 촛농 몇 방울이 또 독 떨어진다. 그 자리에 곧바로 초를 세워 눌러 붙인다. 밥상은 별안간 촛불 세움대가 되고 어둡던 방에 빛무리가 피어오른다. 우리는 그 빛을 떠먹기라도 하듯이 촛불 아래서 먹다 둔 밥을 후룩후룩 마저 먹곤 하였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숟가락은 입을 잘도 찾아갔고, 밥 먹는 소리는 정답게 달그락대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곤소곤 어둠을 살라 먹은 후 우리의 눈빛은 점점 초롱 해져갔다. 정전사태는 숙제하기 싫은 우리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고, 흐릿한 빛 속에서 가족들의 얼굴은 새삼 정겨워 보였다. 어둠이 가족과의 거리를 좁혀준 것이었을까?
삯바느질 감이 많아지면 엄마는 나를 외가에 맡기곤 하였다. 달빛만으로 사방을 분간할 수 있었던 시골 외가 마을. 거기서 본 달빛 추억 하나가 모깃불처럼 피어오른다. 할머니가 모처럼 쑤어준 닭죽이 짭조름했던지 그날 저녁 나는 자다 말고 물이 자꾸 켰다. 할머니를 깨울까 말까 망설이다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혼자서 대청마루로 나왔다. 컴컴하던 눈가에 희끔한 물체들이 안개 걷히듯이 보이기 시작하고 인기척 없는 마당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대청 기둥에 걸렸던 남포등 불빛도 사라지고, 빛이라고는 오로지 달빛뿐이었다.
눈앞이 온통 흑백 영화 장면처럼 어둑하였지만 묘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였다. 토방에 깔린 달빛이 웬만한 것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대문간 옆 울안에서 시종 꽤 객 거리던 거위들도 깊은 밤에 빠져들었고, 사방이 잠잠한 탓에 뒷밭 대나무들의 바람 타는 소리가 세게 들려왔고, 풀벌레 소리가 그 소리에 무슨 비밀 신호처럼 실려 들었다.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댓돌을 딛고 내려와 조금 열린 정주간 문 안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문소리가 삐이~걱 크게 들렸다. 그 사이에 달빛이 나보다 먼저 정주간에 들어가 바닥을 비추었다. 불씨 하나 없이 부엌이 훤해진 것이다. 부뚜막에 걸린 두 개의 가마솥을 보니 할머니를 보는 듯 마음이 푸근하였다.
아궁이 안에는 타다 남은 장작더미와 재가 부서질 듯 엉겨 있었다. 아궁이 속 끄름 덩이는 불씨를 일궈낸 흔적이고 일가의 삶을 일궈낸 불꽃의 화석이다. 불꽃은 아궁이 속에서 피어나고 아궁이 속에 잠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그날의 기억 때문인 것 같다. 어둠과 빛의 자리바꿈이 반복되던 곳. 가족의 서사를 지켜보며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사명을 반복하던 아궁이는 어둠을 쫓아 불꽃을 일구고, 불꽃을 춤추게 하는 불의 궁전이었다. 어둠을 살라 빛을 만드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아궁이 속은 울퉁불퉁 끄름 더께로 두터워졌다. 불꽃이 새로 지펴질 때마다 생명이 빛나고 내일의 희망이 아궁이 안에서 불타올랐으리라.
불쏘시개를 쓸어 담던 부삽과 몽당 빗자루가 풍구 옆에 놓여있었다. 헐거워진 손 풍구 손잡이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풍구 돌리던 할머니의 거친 손마디가 느껴졌다. 달빛과 바람이 살강 위에서 수런거렸다. 주발과 대접들이 포개져 있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간다. 살강 보를 들추고 대접 하나를 빼내려다가 그만 덜그럭 소리를 내고 만다. 정주간을 지키는 조왕신(竈王神)이 잠을 청한 오밤중에 콩만 한 것이 무엄하게 그만 달그락거리고 만 것이다. 나도 놀랬지만, 수탉 한 마리가 더 놀랐는지 뒤란 문 앞에서 벼슬을 꼿꼿이 세우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게 달려들 것만 같은 수탉의 강렬한 눈빛에 더럭 겁이 났다. 수탉은 자기의 목을 늘였다 오므렸다 하면서도 곁눈질을 늦추지 않았다. 밤의 정적 때문인지 목청은 높이지 않았으나 말똥말똥 내 행동거지를 살폈다. 저녁에 우리가 먹은 닭죽 때문인지 수탉은 영 뒤란을 떠나지 않았다.
어둠을 허물어 주던 외가 정주간에서의 달빛 추억과 어둠을 살라 먹던 어린 날의 기억이 창밖에 서성인다. 저녁 기도를 하기 위해 거실에 촛불을 밝힌다. 촛불은 어둠과의 경계 안에서 사물들을 은연히 비춰내고, 사람의 부끄러움까지 비춰낼 듯이 고요하다. 정주간을 들여다보던 내 눈빛과 나를 주시하던 수탉의 눈빛이 창을 넘어와 촛불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과거의 빛과 오늘의 빛이 어둠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