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살 부딪긴 인연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화석처럼 엉겨진 기억들이 밤바람에 흔들린다. 대나무 숲은 바람소리 휘잡아 울어대고, 장지문 고리 세차게 흔들던 어느 겨울날. 바람 따라나선 어린 소년은 물에 비친 달을 보고 밤마다 엄마! 하고 불렀단다.
살얼음 진 개울가에 얼어붙은 달덩이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 어미의 초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달은 대를 이어 사무치게 그리운 나의 초상이 되어버렸다. 한올지던 사람들이 이슬 맞는 빨래처럼 검푸르게 밤새 눈앞에 널려진다.
수행하듯 늘어선 나목 사이로 어둠은 재빠르게 내려왔다. 달무리 진 하늘에 휑하니 어머니의 얼굴이 언뜻 거리고, 아버지의 눈물도 어렴풋이 보인다. 열 살 때, 잃어버린 어미를 찾아 동지섣달 매운바람 속을 헤매 다닌 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 쪽다리 밑에 비친 달을 건져 올리던 아버지의 겨울밤 이야기는 아직도 내 귓가에 남아, 그 시린 손끝을 잡고 있다.
미녀의 속눈썹 같은 초승달을 따라서 선을 이으면 엄마 얼굴이 보인다. 말소리보다 미소가 많았던 엄마의 처녀 시절. 개울가에서 보리쌀 씻던 손끝에 어스름이 묻어나던 저녁 무렵. 개울물에 옷고름 빠칠까 봐 고름 자락을 안섶에 끼워 넣고, 보리쌀 헹구는 처자의 눈빛이 함지박 속으로 모아진다. 상고머리를 한 그녀의 얼굴이 물여울에 어룽거린다.
오후 무렵부터 낯선 사내가 정자나무 뒤에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스무 살 처녀는 손으로 물을 만지듯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처자 이름이 별스럽게도 “처녀”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내는 나주 영산포에서 사구실 촌락까지 달려온 총각이었다. 그는 처자와 같은 마을에 살던 넷째 형수를 보채서, 언제쯤 그녀가 냇가로 나오는지 알아내었던 것이다. 팃검불 하나 없도록 씻고 또 씻는 것을 보니 그녀의 성격이 꼼꼼하고 얌전한 편인 것으로 보였다. 총각은 처자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작심을 하고 나선 길이었는지라, 일찌거니 그 동네에 들어가 있었던 터였다.
총각은 자신의 형수를 조르고 졸라서 천신만고 끝에 그녀의 졸업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똥만 하게 찍힌 사진으로는 그녀의 생김새를 종잡을 수 없었던 터라, 궁금증에 애가 탄 총각이 이래 없이 낯선 마을에 탐정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대문 앞까지 마중 나온 거위 때들이 낯 선 총각의 그림자를 의식했는지, 웬걸 정자나무 쪽을 향해 자꾸 꾸웩 꾸웩 소리를 내는 통에 총각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어스름은 자꾸 깊어져 처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자, 다급해진 총각은 주머니 속에 넣어온 사진 속 얼굴 한 번 개울 쪽 한 번 쳐다보면서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그런데도 처자는 좀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답답증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차에 처자가 바윗돌에서 막 일어서려는 것이 아닌가. 일어서서 마지막 다릿돌을 내디딜 무렵이 되어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문으로 들어갈게 모양새였다. 순간, 총각은 에라 모르겠다 싶었는지 대숲 쪽에다 냅다 돌을 던지며 ‘아이고’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놀라 처자가 뒤를 돌아볼 때를 노렸던 것이다.
용케도 처자가 그 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처녀의 갸름한 얼굴 윤곽과 뒤태를 어느 정도는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스름 속에서도 얼굴빛은 희였고, 얌전한 눈매의 얌전함이 총각 눈에 들어왔다. 장난 삼아 한두 번 만나 본 영산포 처자들과는 품새가 달라 보였다. 그녀와 거위 때가 흠씬 놀랬을 터였지만, 태연히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거위 때도 꽥꽥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 들었다. 총각은 그 처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 뒤태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 총각은 상기된 마음에 다시로 나가는 자라바위까지 단숨에 달음박질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 후, 총각에게 볶다 못한 형수가 정식으로 처자 쪽에 혼담을 넣었으나, 조실부모한 총각의 환경이 마뜩잖은 처자 집에서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총각의 간절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여 총각 인상이나 한 번만 보아달라고 간곡히 다시 청을 넣게 되었다. 처자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영산포 장날에 나가서 총각 얼굴이나 한 번 봄 새하고 못 이기는 척 약조를 하고 말았다.
약속된 장날,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드는데도 처자 아비는 해가 저물도록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하던 처자 어미는 대청마루에서 재 너머 쪽에 하냥 눈길을 박고 있었다. 이윽고 두루마기 휘적거리며 걸어오는 낭군 모습이 바위고개 멀리 보이는 것이 아닌가. 처자 어미는 얼른 토방으로 내려가서 낭군이 대문 앞에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오늘 겁나 늦었소 잉. 어째 총각은 만나봤소?”
“그랬네.”
“어쩝뎌, 코랑 눈이랑은 반드시 제자리에 붙어 있습뎌? 형제간은 몇이나 되고 라우? ”처자 어미는 궁금증 난 것을 이어서 찹찹하게 묻기 시작했다.
“얼굴은 빠진 편은 아니데, 눈빛도 살아 있고,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모름지기 눈에 총기가 있어야 안 한가, 조실부모하고 형 밑에 산다고 하는 것이 쬐간 맘에 걸리네만 제 발등에 불은 끄고 살겠데, 내 보기에는 ”
약주 한 잔 걸치고 오신 것을 보아하니 그다지 싫은 기색은 아닌 것 같더니만, 결국 영산포 총각은 그 처녀와 청실홍실 혼을 엮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되었다.
천생연분이란 정말 있는 것일까? 그냥저냥 살아야 할 우리네 정서 때문에 한 번 짝지어지면 정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굴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처음엔 사랑으로 살다가 나중엔 정으로, 끄트머리엔 법으로 사는 게 부부라고 우습게 말들 하지만 그래도 일부종사하길 바라는 옛 법이 아직도 뿌리 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로 뜻 맞지 않은 것을 내세울 수도 없이 센 쪽의 비유를 맞춰가며 티격태격 살다 보면 얼굴까지 서로 닮아가는 것이 부부요, 그 속이야 다 알 수 없지만 우리 맘대로 그러한 부부를 천생연분이라 칭송한다. 어렵사리 세월이 만든 연분이 아니라, 정말 연분이라 동감하며 사는 부부가 몇이나 될까마는.
그 옛날 어린 소년의 눈물을 얼게 했던 밤바람이 달빛마저 얼리고 있다. 이슬 맞는 빨래처럼 거두지 못한 기억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가 바람에 날린다. 바람꽃 밀려든 산등에 뿌옇게 떠오른 반달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평생 당신은 처녀 하고만 산다고 신소리하며 평생 즐거워하시던 아버지. 이미 저 세상에 가신 두 분, 나란히 저 달 속에서 못다 한 연분 누리고 계시려나.
남은 연분을 이으려는지 다른 반쪽을 찾으려는지, 희끔한 반달이 자꾸만 한쪽으로 몸을 기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