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종이가 지배하는 독일 행정

우리 집 최고의 일꾼, 프린터기

by 여름하늘
독일 생활에서 가장 심장이 쫄깃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거주 허가증(Aufenthaltstitel)을 받으러 관공서에 가던 날이다.


이 도장 하나를 받기 위해, 우리 집 프린터는 이미 며칠째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주 신청자인 남편의 재직증명서부터 집 계약서, 그리고 한국에서의 아이들의 예방접종 증명서까지 혹시라도 빠진 서류가 있을까 몇 번이고 출력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 출력했다. 그날 아침, 두툼한 서류 뭉치를 가지고 외국인청(Ausländerbehörde)으로 향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항 출입국 심사대 앞에만 서면 가슴이 쿵쾅거리는 그 기분, 그날은 유독 그 울림이 컸다. 아이들에게도 몇 번이나 "오늘은 정말 얌전히 있어야 해"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관공서 건물이 주는 특유의 위압감 때문이었으리라.


높은 천장과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그 옛날 한국의 병원이나 시청 바닥에서나 봤음 직한 작은 동그라미 무늬의 돌바닥 위로 우리 가족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겨우 예약된 호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 사이로 하이쭝(라디에이터)의 미미한 온기만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류만 넘겨보던 직원이 우리를 힐끗 보더니, '꽝!' 하고 도장이 찍혔다. "모든 서류가 완벽합니다"라는 신호였다. 그 짧은 미소 하나에 남편과 나는 서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도장 하나를 받기 위해 우리 집 프린터기를 얼마나 달달 볶았는지 모른다.


서류 하나라도 미비하면 다시 테어민(예약)을 잡아야 하고, 그러면 아이들의 학교 입학이 줄줄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번역기가 잘 동작하지 않는 문장은 직접 타이핑까지 쳐가며 재차 확인하고 출력하기를 반복했다. 독일 행정의 세계에선 '파일 전송'보다 '종이 출력'이 훨씬 신뢰받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외국인청에서 승인받은 서류를 들고 학교를 찾아가면, 학교는 또 다른 종이를 내민다. 그 서류들을 챙겨 방과 후 돌봄 교실인 '호르트(Hort)'에 가면 점심 식사와 귀가 시간에 관한 새로운 서류 뭉치가 추가된다. 각자 사인하고 너 한 장, 나 한 장. 그렇게 복사기와 프린터기는 끊임없이 A4 용지를 뱉어낸다. 같은 방법으로 둘째를 위한 유치원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의 피날레는 어김없이 '우편물'로 장식된다.


이메일로 처리하면 1분이면 끝날 확인 문서가 굳이 며칠을 걸려 종이봉투에 담겨 다시 돌아온다. 혹시나 놓친 것이 있을까 봐 출력된 문서를 한 줄 한 줄 줄을 쳐가며 읽고 파일링을 해두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엔 "이게 굳이 필요할까?" 싶어 소홀히 했지만, 언젠가 꼭 그 한 장의 종이가 없어 곤란해지는 상황을 겪고 나니 이제는 아예 모든 서류를 '시스템화'해 두었다.


독일에서 매일 아침 우편함을 확인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루틴이다. 정부 기관과의 소통은 우편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특히 돈을 내라는 편지는 가장 두렵다. 미리 문자나 이메일로 언질이라도 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련만, 편지 봉투를 찢는 그 찰나의 순간은 매번 사람을 후들후들하게 만든다.


한 번은 속도위반 과태료 고지서를 받은 적이 있다. 제한 속도 30km 구간에서 8km를 초과한 '38km'로 찍힌 고지서였다. 그날 우편함에서 발견한 낯선 봉투는 뜯기도 전부터 오싹한 기운을 풍겼고,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궁금한 게 있어 관공서에 전화를 걸어본 날도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백 번쯤 고른 뒤 용기를 내어 다이얼을 눌렀지만 연결이 안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클래식 대기음을 듣다 보면 결국 깨닫게 된다.


'아, 그냥 내가 서류 들고 직접 가야겠구나.'


이런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8개월이 넘도록 보증금(Kaution)을 돌려주지 않는 게 아닌가. 수십 번의 이메일 독촉도 소용없었다. 아무런 답변이 없자 결국 나는 일단은 1년까지는 기다려보자는 마음을 접고, 집 계약서를 스캔해 보증금 반환 기한이 명시된 조항을 캡처 하여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토록 묵묵부답이던 보증금이 바로 입금되었다. 우연의 일치였을 수도 있지만, 우리 부부는 확신했다.


독일에서는 디지털의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종이 위에 박힌 글자와 법적 근거가 주는 힘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그림1.jpg

독일은 어쩌면 '행정판 분데스리가'다. 철저한 연방제 국가이기에 각 지방 정부는 독립적인 리그처럼 운영된다. 기관 간 정보 공유는 제한적이고, 지자체 간 정보 공유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내가 증명해내야 한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가 속한 지방 정부가 확인해 준 '종이 서류'를 직접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우리 집 프린터기는 묵묵히 제 소임을 다했다.


그림1.jpg 차곡차곡 모아둔 행정처리의 흔적들. 안내 편지에는 항상 모든 선생님들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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