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일
- 윤동주 '서시'와 '아우의 인상화'
교육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일
- 윤동주 ‘서시’, ‘아우의 인상화’
우리나라 국민 모두 사랑하고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시 ‘서시’
일제 강점기 비극적이고 슬픈 죽음을 맞이한 젊은 시인 윤동주에 대한 우리 국민의 마음은 비슷하다. 젊은 죽음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일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일으킨다. 짧은 생을 살다 간 아까운 시인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봤다. 윤동주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지만, 삶에 대한 부끄러움만은 똑같이 가득했던 청년, 윤동주의 사촌 형 ‘송몽규’를 만난다.
영화를 본 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여운이 뇌리에 너무 깊게 박혀서 아팠다. 동주와 몽규가 교차하며 일본 형사 앞에서 항변하고 자기 삶을 부끄럽다고 외치던 20대 청년들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영화에서 울리던 시의 구절들을 몇 번씩 되뇌었다.
윤동주의 시들을 다시 찾아 읽었다. 시집을 읽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막내 동생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떠올랐고 시 ‘아우의 인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엉뚱한 대답을 잘하는 어린이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긴 대답이 귀엽지만, ‘서시’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인데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나는 커서 사람이 될래’라는 엉뚱한 말을 듣고는 자신의 이름조차 강제로 빼앗기게 된, ‘사람’으로서의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처참한 현실의 심정을 서럽다고 느낀다. 어린 동생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갈 일이 슬프고 서러워서 안쓰럽게 바라본다.
영화에서 젊은 동주와 몽규는 어린 동생이 말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울부짖는다.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자기 삶을 성찰하고 괴로워한다. 이미 그들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지금, 나는 영화를 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한다.
교육의 궁극적 목적, 방향성은 무엇일까? 교육이 바라보아야 할 마지막 종착지는 좋은 대학 진학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목표, 자신의 꿈을 위해 지식을 익히고 실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양심을 벗어나 창피한 언행을 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타인이 그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순된 현실, 그래서 요즘 나온 말이 ‘왜 부끄러움은 항상 우리들의 몫인지’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각기 다른 인간성과 능력과 욕망을 읽게 된다. 아이들이 본래 타고난 기질, 성향, 능력은 다 다르다. 정말 공부 머리가 없는 아이도 있다. 정말 운동 능력이 떨어지고 음악적 미술적 재능이 없는 아이도 있다. 그런 기질과 성향은 교육을 한다고 해도 잘 길러지지 않는다. 누구나 다 재능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재능과 능력을 알게 하는 것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소질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가진 욕망과 인간들의 욕망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물욕과 권력욕, 과시욕과 잘난 척, 시기와 질투, 이간질 등 자신이 가진 혹은 친구들의 욕망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물론 교육으로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일평생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교육을 통해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 능력을 최대한 끄집어낼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당시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을 담당했고 그 학생들이 3학년이 되었다. 2015년 3월 학기 초에 3학년 대상으로 학생자치법정을 운영했었는데, 3학년 학생 중 변호사와 검사를 지망한 학생들의 성향을 보고는 웃음이 났었다. 평소 국어 시간에 기가 세고 자기 목표가 확실하고 이성적인 아이들이 주로 검사를 지망했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심이 많았던 학생들이 주로 변호사를 희망했다.
그 학생들이 누가 더 선하고 악하고 옳고 틀리고가 아니라, 각기 성향에 맞게 신청한 것이 흥미로웠다. 자기 성향에 맞게 진로를 잡되, 인간적인 선함을 지니고 헛된 것에 현혹되지 않게 자기 삶의 중심만 잘 잡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움은 대학교만 들어가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짜 공부는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임을 이해할 때 시작된다. 그래야 어떤 유혹과 억압과 차별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나 자신을 온전히 지키는 힘을 키울 수 있다.
2012년도였을 것이다. 복도에서 약한 학생을 괴롭히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 그 학생을 불러 세웠다. 남자 선생님조차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었다. 중학교 학생들이 어떤 아이들인가? 담임도 교과 샘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이다. 하물며 수업도 담당하지 않아 알지도 못하고 만만한 여자 선생님이 자신을 불러 세웠으니 우스울 수밖에 없다.
‘왜 너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냐?’고 묻자 ‘괴롭힌 적 없다’라고 시치미를 떼면서 실실 웃는다. 그 아이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근데 말이지, 세상 사람들을 다 속일 수는 있어도 절대 못 속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누군지 아니?’라고 물으니 놀라며 바라본다. ‘자기 자신이야.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자기 자신만은 진실을 알고 있지’라고 말하며 그 남학생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아이는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조용히 나를 쳐다봤다.
그 이후로도 점심시간에 급식 지도하는데 새치기하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제재하지 못하면서 약한 다른 아이들의 부도덕성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지금의 교육 현실은 식당에서 새치기하는 남학생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식판으로 맞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 심호흡하고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새치기했으니 맨 끝으로 다시 가라 ‘고 하니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아이는 다행히 나를 잠시 보더니 맨 뒤로 갔다. 그러고 나서 다른 곳을 지도하다 보니 또 새치기해서 이미 식판에 밥과 국과 반찬까지 다 받고 있었다.
순간 '저걸 어찌해야 하나, 저걸 뺏으면 저 식판으로 얻어맞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학생에게 다가가 눈을 바라봤더니 식판을 통째로 들고 식당 밖으로 나간다. 어떡할까 하다가 식당 밖 나무 벤치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그 아이를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식당에서 못 먹는 것만으로도 벌이겠거니 하고 그냥 두었다.
10여 년이 지나 성인이 된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 아이가 타인은 속여도 자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남은 속여도 자기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삶을 살면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알고 성찰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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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