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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침이 11시 30분을 지나는 동시에 짝을 맞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고민이 많은 날에는 빨리 먹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아 쉬는 게 세상 안전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얼음컵에 커피를 담아서 허기를 달랬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의자 목받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오전 내내 억눌려있었던 불안이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
유튜브에서 배웠던 4초-6초 호흡법을 떠올렸다. 살기 위해서. 들이쉬는 공기는 여전히 묵직했고 숨이 나가야 하는 목은 굳어있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더 깊이 눈을 감는 순간, 귓가에 잡음 같은 웅성거림이 스며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복도에 서 있었다. 형광등이 깜빡이고,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서 겹쳐졌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으나, 그 음성은 물속에 잠긴 소리처럼 불분명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차가운 주사기를 들이밀었다. 저항하기도 전에 바늘 끝이 피부에 닿았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네가 먼저 도망친 거야”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였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소리는 코가 아닌 가슴을 찔렀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그동안 혜주의 잘못만 붙잡고 있었고, 내 몫의 잘못은 철저히 지웠다. 애써 무시하고, 생각 저편으로 밀어내며 혜주가 없는 삶을 꾸며왔다. 조금의 우위를 잡으며 지나간 인연을 무시했다.
근데,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 생각과 동시에 숨이 막혔다. 발밑이 꺼지는 듯 몸이 흔들렸다. 필사적으로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주었다.
서울. 이제 불과 몇 정거장 거리에 혜주가 있다는 사실. 이렇게 반복되는 꿈들이 어쩌면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라, 만나야 한다는 신호라면? 오랫동안 혜주를 피해왔고 나만의 방식으로 왜곡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끝까지 진짜 혜주에게 도망만 다닐 게 분명했다.
그 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가 겹쳐졌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천장의 규칙적인 형광등의 불빛이 희미하게 번져오며 현실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사무실의 풍경이 희미하게 드러났고, 낯선 복도의 그림자들은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도 같은 꿈을 꿀 게 분명했다.
마음을 먹고 책상 위의 핸드폰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