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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자전거 03화

운동장

<3>

by book within

낡아버린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같았다. 말끔한 잔디는 뜯겨 있었고, 깊이 파인 구멍만큼 하늘이 어두웠다. 그때, 멀리서 공 차는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공이 굴러왔다.


“야, 여기!” 누군가 소리쳤다. 고등학교 때 걘가?


공이 가까워지자 엉거주춤한 자세를 풀고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발끝에 공이 닿는 순간 몸이 가벼워졌고, 몸이 편안해졌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과 아마추어 전국 대회에 나갔었고, 64강에서 패배한 우물 안 개구리들은 교내 대회에서 꿈을 이뤘다. 그 이후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같이 공을 차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과는 다르게 나는 그들과 친하지 않았다. 늘 혼자 기뻐했다. 방법을 몰랐다. 몇 년이 넘도록 그 친구들과 어떠한 개인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어릴 적부터 감정을 나누는 법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결혼식에서 마주친 동기들. 그들의 표정은 그날과 똑같았다. 그 중심에 내가 애써 무시하고 지나갔던 그 사람이 있었다.


-결혼식에 왔던 게 맞았구나. 혼자 한 생각이 바람처럼 메아리쳤다.


수습하려 했지만, 입이 굳었다. 동기들의 웃음과 말소리가 커졌다. 뭔가 잘못됐다. 내 말 듣고 웃는 거 맞지?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몰아쳤다. 두피까지 화끈거리며 머리가 가려워졌다.


그다음 날 꿈에는 수영장에 서 있었다. 타일을 울리는 물소리는 경기가 한창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멀뚱히 서 있는 내 손에 오리발이 쥐어졌다.


“두 바퀴 돌아!” 태어나서 오리발을 써본 적이 없는데?


경기와 달리 장난 같은 분위기였다. 오리발을 끼는 와중 누군가 나를 물속으로 떠밀었다. 역시나, 초등학교 이후 한 적 없었던 수영 실력은 처참했다. 몸과 다리가 반쯤 잠긴 채 머리만 내민 채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갔다. 옆 레인에서 넘어오는 물살이 계속해서 나를 짓눌렀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팀원들의 기대와,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물결 속에서 뒤엉켰다.


“넌 할 수 없어.”라는 말이 물 밑에서 울려왔다.


어릴 때 좋아했던 축구와 수영, 그리고 자전거 타기가 내 마지막 자유로운 기억이었다. 이제는 속으로 자유를 푸념한다. 불안에 짓눌려서. 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바라는 자유는 ‘경제적 자유’라는 사회적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경기가 끝난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를 가게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운동장과 수영장의 기억에 그때의 친구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대학 동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누군가로 계속 변해갔다.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웃음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점점 지저분해지는 주변에 사장님의 눈치가 보였지만,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혼란 속에 어떻게든 있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테이블 끝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사라졌다.


“왜 이렇게 조용해?”

그 목소리에 가슴이 조이고 숨이 얕아졌다. 답답함에 말을 꺼내려했지만, 당연히 내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천천히 사라졌고, 둘만 남은 듯 조용해졌다. 결혼식에서 마주쳤던 어색한 미소, “재수 없다”는 속삭임이 기억났다.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또다시 몸이 떠올랐고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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