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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이룰 효도 : 수영장 딸린 집

화목하지 못한 집에서 아이가 느끼는 죄책감

by 이지은

아빠가 엄마를 향해 페트병을 번쩍 들어 올린 날.


그날부터 내 소원은 [우리 부모의 이혼] 이 되었다.


다행히 페트병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지만, 페트병이 낙하하던 그 몇 초 동안 나는 상대성이론을 온몸으로 이해했다. 아인슈타인이 맞았다. 시간은 엄청나게 상대적이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강한 애착을 형성하기에 아마 모든 아이들이 비슷한 마음을 느낄 것이다. 엄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었고 엄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었다.


특히나 엄마의 적은 나의 적이다!

아빠를 타도하자!! (그땐 그랬다.)


엄마의 한숨은 단전에서 끌어올린 것이었다.

들숨과 날숨으로 집안을 들었다 놨다 했다.


주제넘게 감히 엄마에게 이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해본 적이 있다.

엄마는 한숨만 쉬었다.


'나 때문이야, 돌봐야 하는 자식들이 있어서 이혼할 수 없는 거야'


나는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나는 엄마의 발목을 잡은 죄인으로 깊은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때문에 불행을 견디는 엄마.

불쌍한 엄마에게 잘해야겠다.

효도해야 한다.

부채감이 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엄마를 호강시켜줘서 이 빚을 갚고 싶었다.

하지만 효도는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공약을 전격적으로 발표했지만 그것은 내가 취업준비를 시작할 무렵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민망하게도 공약은 수영장 연간 회원권을 끊어주는 것으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사실 그마저도 아직 지키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연간 회원권은 은근히 비싸다...)


나는 자식들이 모두 결혼해 둥지를 떠나면 엄마가 이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아직도 사사건건 싸우시면서도 두 분은 같이 사신다.


지긋지긋하다면서도 늘 함께하신다.

그러다가 또 죽이 맞을 때는 함께 여행도 다니시고 한다.

돌아오실 때는 늘 원수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나도 연애를 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보니

아.. 우리 엄마 아빠도 두 분이 좋아서 결혼하신 거였지.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서로가 필요해서 함께 하시는구나. 싶다.


아이 어릴 때는 아이 핑계로 함께 살고

아이가 크면 다 늙은 나이 핑계로 함께 사는 거구나.

내가 괜한 부채감을 안고 살았구나.

이런 이해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 "내가 다시는 네 아빠랑 여행가나 봐라!"라는 말을

"내가 다시는 내 남편이랑 여행가나 봐라!"로 바꿔 듣기로 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농담 삼아

"수영장 딸린 집은 어떻게 돼가니?"

라고 종종 물으신다.


예전에는 사기공약의 주인공으로서 무안함에 몸 둘 바를 몰라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말한다.


"배 째! 내 코가 석자야!"


이지은의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written_by_leeji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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