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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시킬 용기

인정에 대한 갈망

by 이지은

나에게도 행복했던 기억 한 조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나?

전과목에서 딱 두 문제 틀렸던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뱅글뱅글 돌려줬다.

투포환 선수가 포환을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엄마가 날 예뻐해주고 있어!

나 꽈찌쭈도 햄보칼수가이써!!



슬쩍 본 유토피아를 잊을 수 없었다.

행복과 기쁨이 넘실대는 세상.

"올백"의 문 뒤에 유토피아가 있다!


물론 행복의 '휠윈드'가 끝난 후

곧바로 틀린 2문제에 대한 분석과 따끔한 비판의 시간이 있긴 했지만

여하튼 그 일은 내 기억에 깊이 남았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진심이었다.


아시다시피 공부를 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놈들이 더한다고 머리 좋은 녀석들이 노력까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놈들은 공부를 그렇게 하면서도 삼국지를 열 번씩 읽고

정답지도 재검 삼검까지 하는 녀석들이었다.


반면 나는 옳은 것을 골라야 할 때 틀린 것을 고르고

찍어도 꼭 오답을 찍었다.

(모를 땐 3번, 수학 주관식 답은 0 아니면 1 이라더니..)


대망의 수능날

졸아도 책상에서 졸던 노력이 가상해 하늘이 도왔을까?

늘 3~5등 언저리에 머물던 내가 반에서 1등을 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껏 내 인생 최고의 성적이었다.

내가 해낸 것이다!!

만세!!


'엄마! 행복하지?! 이제 '휠윈드' 돌려주세요!!'


하지만 엄마는 논술이니 경쟁률이니 하며

다른 엄마들에게 전화를 돌리느라 바빴다.

사실 디스크 수술까지 한 엄마에게 진짜 '휠윈드'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토닥토닥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수능 뒤에는 논술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는 학점과 토익이

그 뒤에는 취업이!!

이 경주에는 결승점이 없었다.

역시 꽈찌쭈는 햄보칼수가 없는 건가?


그렇게 나는 해결되지 않은 인정에의 목마름에 허덕이며 살아왔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얼마나 인정받는지가 더 중요했다.


회사는 차라리 상대하기 쉬웠다.

회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면 고과와 연봉으로 인정을 해줬으니까.

하지만 친밀한 관계에서는 문제가 훨씬 복잡했다.

최고의 아내나 최고의 엄마가 되려면 어떤 성취를 이뤄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나만의 최고 가족 구성원이 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 그 비법을 여러분들에게만 공개하겠다!


1. 화내지 않기

2. 내 욕구 숨기기

3. 상대방이 원하는 것 최대한 들어주기

4. 굉장히 바쁜 듯하면서도 의지하지는 않기


이 비법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

왜냐면 비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내면에 분노와 피해의식이 쌓여 천사의 탈을 쓴 마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는 그 마녀를 아주 무서워하게 된다.

천사 인척 안 해도 되니 마녀만 되지 말란다.

그냥 너 꽈찌쭈가 햄보케지면 된단다.

지금까지 나 뭐한 거니..?


별로 이룬 것도 없는데 벌써 경기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가 됐다.

으잉? 여긴 어디. 난 누구?

"잘했다. 수고했다." 이 소리 한번 들으려고 정말 겁나게 고생했다!

인정.. 그게 뭐라고!


인정받아야만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인간의 가치는 증명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닌데 말이다.

우린 태어날 때 이미 고귀한 존재이지 않은가!


'휠윈드'야 안녕~

나는 이 경주에서 기권하기로 했다.

[실망시킬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냥 여기서 행복해지기로 했다.


그래 나 이런 사람이다.

실망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나니까!


이젠 이런 나라도 내가 좋아해 줄 거다.

이 정도면 뭐 나쁘지 않다고.

수고했다고~



이지은의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written_by_leeji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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