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한다. 깔려 죽을지도 모르니 각오 단단히 하시기를!
나는 대중교통 성추행은 물론 친족 성추행까지 경험한 여자다.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나는 내가 고통받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남편의 백허그를 니킥으로 받아치면서도 내가 왜 그러는지를 몰랐다.(추행범들은 대체로 뒤에서 접근한다)
아이가 내 품에 파고들 때 나도 모르게 밀어내는 이유를 몰랐다.
나 스스로를 더럽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내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몰랐다.
덮어놓은 고통이 너무 커서 들춰낼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치유하는 방법도 모르지 않는가?
잊고 살 때는 괜찮은 줄 알았다. 예쁜 꽃만 보며 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꽃이 이유도 모른 채 자꾸 시들고 또 시들었다. 그러다 그 화분 속을 파보니 시커멓게 곪은 상처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난 어린 시절 삼촌과 함께 컸다.
삼촌은 나를 유독 이뻐했다.
나도 그런 삼촌을 잘 따랐다.
유년시절 함께 연 날리고 물고기 잡던 추억 가운데
잘 차려진 밥상위에 신발마냥 어색하고 이상한 기억이 하나 있다.
어두운 방에 삼촌이 누워있다. 나는 그 위에 올라앉아있고 삼촌이 내 허리를 잡고 앞뒤로 흔들고 있다.
나는 말타는 놀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래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것이 꺼림칙했다. 그때 동생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는 너무 놀라 나가라고 외쳤다. 동생은 바로 나갔고 삼촌은 빙그레 웃으며 나를 칭찬해줬다.
"잘했어."
잘했다는 그 말이 뇌를 갈아버릴 듯 머릿속을 뱅뱅 맴돈다. 기억은 여기까지다.
이 기억은 마치 어긋난 퍼즐처럼 이 구석에도 저 구석에도 도저히 끼워 맞출 수 없는 조각이 되어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딸이 여자아이의 모습을 띄기 시작하자 다시 불쾌한 냄새를 피우며 떠올랐다.
겨우 이만했던 나에게 어떤짓을 한건지 그제서야 감이 왔다.
신까지 벌주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아무리 그래봤자 이런일이 있기 전의 나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나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었다.
삼촌을 왜 그렇게 좋아했냐고, 왜 거부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랐냐고, 왜 동생을 쫓아내고 왜 엄마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냐며 수많은 비난을 나 자신에게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공격당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당신이 비난하고 있는 당신은 몇 살인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나
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어린아이를 욕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너무 어리고 약한 존재여서 거절하지 못했다고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너무 외로워서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고
아무도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대로 얼어버려 가해자에게 분노 한번 못해본 사람들이 많다. 당신 안에 억압된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튀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에 아무리 분노해도 그것은 빗나간 분노이기에 근원의 감정이 해결되지 않는다. 당신은 가해자에게 소리쳐 분노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안전한 공간에 있을 때 그놈이 앞에 있다고 생생하게 떠올려보라. 그리고 지금껏 하지 못했던 말을 큰소리로 외쳐라.
"야이 나쁜 새끼야!! 야이 천벌 받을 새끼야! 어떻게 이렇게 어린아이한테 그럴 수가 있어! 한 번만 더 날 건드리면 죽여버릴 거야! 손대지 마!!"
어떤 말이든지 좋으니 분노를 실컷 표현하고 통곡이 나거든 많이 울어라. 당신은 당신의 아픔을 제대로 마주하고 겪어낸 적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곡을 하며 떠나보내듯이 당신의 아픔도 곡을 하며 떠나보내라.
그리고 당신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라.
"네 탓이 아니야. 저 놈들이 나쁜 놈들이야. 얼마나 놀랐니. 얼마나 외로웠니. 이제 내가 지켜줄게"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내 눈물이 흘러내려 그 아이에게 묻었던 검댕이들이 씻겨져 내려갔다. 그러자 그 아이는 애초에 더러워질 수 없었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날 이후 나를 괴롭히던 마음들이 많이 편안해졌다.
당신도 혹시 지지리도 운이 없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내가 했던 방법으로 당신도 당신 안에 얼어있는 어린아이를 위로해주기를 바란다.
소리쳐 분노하기 어려운 사람은 보내지 않을 편지를 써도 좋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아픔을 가장 잘 알고 위로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당신은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
- 가해자와 직접 대면했다가 당신이 더 상처 받을 수 있기에 꼭 상상으로 하라고 권한다. 뇌는 강하게 상상한 것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거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독자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친족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내는 것은 신도 못할 일이니 이번만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상처 받은 영혼에게 가닿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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