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기회를 놓쳤다
나에겐 그날이 몇 가지 있다. 뭐냐고 물어보면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날이 닥치면 알 수 있다.
난 눈치코치가 빠르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리라고 하는데 차에서 나가기 싫었다. 가만히 있자 아빠는 목줄을 채우고 안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는 가자고 목줄을 잡아당겼지만 난 버텼다. 엄마 아빠를 따라가면 분명 내가 싫어하는 어떤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엄마와 실랑이하고 있는데 아빠가 덥석 안아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내 예감이 적중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잊을만하면 이곳에 온다.
예전 그날 일이 생각나 대기실 의자에서 꼼짝 하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땐 뭣도 모르고 실내 여기저기를 다니며 냄새 맡고 냥이에게도 관심 가졌다. 이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치챘기에 호기심이 싹 달아나버렸다.
엄마 옆에 가만히 있는데 뒷다리가 조금씩 떨리더니 심장도 두근거렸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언뜻 보였다. 그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자두 아빠, 이것 좀 봐. 자두 떨고 있어! 심장도 뛰고. 어떡해?”
“허, 그것 참!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엄마 아빠의 음성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점점 얼음이 되어갔다.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를 것만 같다. 난 어떡해야 하나. 병원 문이 닫혀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다. 주변을 살피는데 어떤 사람이 나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만약 저 사람 뒤를 따라 나간다면...
아빠는 손에 들고 있는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 출입문이 열렸다.
지금이다. 난 엉덩이를 살그머니 들고 문 쪽을 향했다.
“자두, 들어오세요!”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서둘러 나를 안고 흰 가운 입은 남자 앞으로 갔다.
난 도망갈 기회를 놓쳐버렸다.
엄마는 책상 위에 나를 올려놓고 그 남자와 얘기를 나눴다. 그 남자는 내 눈을 살피고 귀를 들여다보았다. 가슴부위에 뭘 갖다 대고 가만히 듣기도했다. 더 이상 내 몸에
하지만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 안고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낯익은 여자도 한 명 뒤따라 들어왔다.
그렇게 또 그날을 견뎌야 했다.
나가는 문 쪽으로 엄마를 당겼다. 엄마도 내 맘을 아는지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복도에서 아빠가 간식을 주었지만 먹고 싶은 생각이 1도 없었다. 엄마는 입에 넣어 주었지만 뱉어버렸다.
엄마아빠, 그리고 그 남자. 그 여자. 모두모두 싫고 밉다.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