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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신이다'와 '카스하라'

by 염치불고


20년도 더 지난 대학시절, 독일에서 유학하신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랬다. “한국에서 자꾸 손님은 왕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손님이 왕이에요? 돈 좀 냈다고 왕 노릇해도 되나요. 장사하면서 그렇게 비굴할 필요도 없어요.”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친절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서비스업 얘기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비스업이 성장하며 사회 전반에서 친절의 중요성을 구호처럼 외치던 시기 성장한 세대다. 그리고 가 대학을 다니던 당시 한국에서는 패밀리레스토랑 등에서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퍼피 독’ 서비스가 유행했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의 이 말씀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오죽했으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겠나.

사실 그 20여 년 간 한국도 이른바 갑질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서 손님은 왕이다 같은 말이 예전처럼 자주 들리진 않는다. 어떤 면에서 손님에 대한 친절이나 배려는 좀 더 비싸진 느낌이다. 냉정히 말해 손님이기에 응당 받아야 할 친절이란 없으며 모든 서비스에는 나름의 값이 있고, 그 수준이 높을수록(혹은 정성을 다할수록) 비싸진다는 것을 지금의 손님들은 잘 알고 있다. 최소한 한국에서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도쿄 집 근처 동네 문구점에 갈 때마다 다소 몸 둘 바를 몰라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문구점 할머니는 공책 한 권을 사는데도 매장 밖에까지 나와 고개 숙여 인사를 주신다. 할머니 가게의 노트는 이온 같은 대형쇼핑몰에서 파는 것보다는 10엔(약 100원) 정도 비싸지만 근처 동네 편의점보다는 싸다. 그래서 받는 서비스라기엔, 혹은 노트 한 권에 대한 서비스로는 너무 과하지 않나. 문구점 할머니의 몸에 밴 친절은 모든 친절이 가격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서비스 천국으로 불리는 나라다. 2020년 도쿄올림픽 홍보과정에서 유명해졌던 말, 최고의 환대를 의미하는 ‘오모테나시’는 일본의 친절을 상징하는 유명한 말 중 하나다. 도쿄에서 지내며 이에 더해 ‘손님은 신이다(お客様は神様)’라는 말을 알게 됐다. 지금은 세상을 뜬 일본 엔카 가수 미나미 하루오가 1960년대 자신의 공연에 온 관객들에게 처음 쓰며 유행을 했고 지금까지 통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왕보다 높은 신! 아 그랬구나, 문구점 할머니의 친절은 종교에 가까운 거였던가.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손님을 정중히 모셔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박에 가까울 만큼 퍼져 있었던 것 같다. 40년 전 도쿄디즈니랜드 개장 초 서비스 관련 교육을 담당했던 고마쓰타 마사루가 쓴 책 '친절을 전염시켜라'를 읽다가 특히 그 생각을 했다. 얼마나 치밀하게 서비스 매뉴얼을 만들고 교육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었는데 가끔 저자가 감동사례로 꼽은 어떤 일화들은 오래전 쓰였다고 해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예컨대 비 오는 날 정장 스커트를 입고 온 손님이 회전목마를 타지 못해서 속상해하자 직원이 빗물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쪽 무릎을 내주며 밟고 올라가라고 했다든지, 진상 손님에게 머리채를 잡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웃는 얼굴로 서비스를 했다든지 하는 사례들을 보면 아니 뭐 이렇게까지 극한 서비스를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다만 세상이 바뀌며 일본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오랜 저출산 고령화로 서비스업의 인력난이 심화되며 일본 특유의 섬세한 서비스가 과거만 못해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예로 일본의 전통숙소 료칸에서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주거나 이부자리를 펴주는 서비스 같은 것 등은 이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정성을 다하는 서비스는 일본에서도 더 비싸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카스 하라(カスハラ)라는 신조어도 유행 중이다. 영어로 소비자를 뜻하는 customer와 괴롭힘을 뜻하는 harassment를 일본식으로 바꾼 말인데, 한국으로 치면 진상손님 갑질이라는 말과 비슷할 것 같다.

일본의 유통 서비스업 노조인 UA젠센이 올해 초 진행한 카스하라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2년 이내 카스하라 피해를 당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46.8%에 달했다. 얼마 전 일본의 방송에서는 이 카스하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당시 이방인인 내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본의 많은 회사들이 손님 갑질에 따른 피해를 인지하면서도 ‘손님은 신이다’라는 말의 압박 때문에 자사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말이 일본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인지, '손님은 신이다'의 원조 미나미 하루오의 딸이 '아버지에게 손님은 청중이며, 청중 앞에서 신을 대하듯 맑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대한다는 의미일 뿐 손님이 신이니까 철저히 모시고 최선을 다하라, 무엇이든 해도 참으라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라고 해명했을 정도다.


말의 유행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래서 '손님은 신'이라는 말에 한동안 강력히 지배됐던 일본사회에 '카스하라'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또 다른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도쿄도는 지난 10월 ‘카스하라 방지 조례’를 제정했다. 인력난이 심화되며 기업들도 카스하라에 대한 대응책을 속속 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제 아무리 신이라도 갑질은 곤란한 시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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