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9화)
황하와 한강은 중국 땅과 한반도를 상징하는 강이다. 국토를 대표하는 강이지만 그 이름을 딴 지명은 보기 어렵다. 단지 시나 노래에서 강 이름을 들먹이나 지명에 스며든 경우는 찾기 어렵다. 왜 그렇까?
중국 땅에서 삶의 터전 주변의 지명은 황하가 아닌 강에서 유래한 것이 많아 이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먼 고향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기원전 9~7세기 나온 시경을 보면 강과 삶을 연결하여 노래한 시가 있다.
위국衛國에서 타향살이하는 송宋나라 사람의 고향 생각, 한강변에서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해 애달파한다는 내용등.
황화 문명은 끊이지 않고 흐르는 강물에 건립됐다. 황하뿐만 수백 개의 강이 모세혈관처럼 대지에 완연히 흘러 땅을 기름지게 하였다. 산 사이에 흐르는 강물이 산의 제지를 받으면 격량을 만들고 호수로 흘러가고 얕은 하천으로 들어서기도 했으나 흐름은 도도했다.
엣 사람은 물을 좇아 기거하고 물과 함께 생활하며 물길에 대해 노래하였다. 공자도 이런 강의 물길을 보면서 노래하길 ‘죽은 자가 사람을 속이는 것과 같다. 낮밤을 버리지 못한다’ 하였다. 그래서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을까?
현재의 중국인들도 타향에서 표류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황하의 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흘러 고향에 다다른다. 그러다가 어떤 특정한 날에 강의 흐름을 빗대어 고달픈 삶을 노래하곤 한다.
우리 한강의 경우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삼국의 쟁탈지,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서 인지 옛 문헌에 한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시나 노래는 찾기 어렵다.
단지 역사적 사건이나 배경을 간접적으로 다룬 기록이나 한강 주변에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노래한 민요는 있다. 왜 한강의 아름다움과 삶을 묘사한 작품 기록이 드물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고달픈 처지가 되면 한강을 바라보며 노래하곤 한다.
땅의 형성 측면에서 황하는 젊은 편이나 중국 문명사에서 보면 오래된 강이다. 이 강이 만든 옥토에서 찬란한 농경문화를 꽃피웠으며 문자 만들어 냈다. 옛사람 마음에 황하는 문명의 본보기이었다.
하河는 원래 황하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3세기경 황하 두 글자가 처음으로 시문에 보인다. 그러다가 당송唐宋시기 황하라고 규정된다.
왜 황이라 했을까? 기원전 487 좌전에 실린 시詩을 보면 일생 황하의 변화를 기다릴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누렁 물길을 보면서 ‘황하’라고 불렀을까? 200년 후 이 물길을 탁하濁河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기를 정할 수 없지만 황하黃河란 말이 대세를 이룬다.
황하 이름은 유명하여자 멀리 퍼졌다. 그러나 황하 유역의 도시나 농촌에 황 글자가 들어있는 지명을 찾기 어렵다. 섬서성에 황롱현 황령현 두 곳 지명에 황 글자가 보이나 이는 황제령과 황용산에서 나온 이름이다.
황하는 온통 누럴까? 강의 물길을 거꾸로 올라가서 물길의 근원에 이르면 물 색이 황색이 아님을 발견한다. 옛사람은 황하의 근원을 탐구했다. 사마천은 대완열전에서 황하의 근원을 현재의 신장 화전 일대인 우전이라고 하였다. 진晉 나라 시기 장화가 쓴 박물지에서 현재의 성국해星宿海인 성숙星宿이라고 고쳤다.
당나라 시기인 635년 장군 이청과 후군집이 토곡혼 군대를 추격할 때 성숙을 지나 백해栢海(현재의 령화鄂湖와 찰령호)에 도달했는데 이곳을 황하의 근원지라 여겼다. 오늘날 황하의 원류는 파만객라巴顔喀垃 산 북쪽 산속에 흐르는 일곡日曲임을 알고 있다.
황하를 색깔로 보면 처음은 백색과 남색으로 흐르다가 홍색이 되고 다량의 진흙과 모래가 흘러들어 비로소 황색이 된다.
청해성 황원현과 감숙성 임하시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름 기원은 두 현縣에 흐르는 황하의 지류인 황수湟水와 대하하이다. 이 두 강은 진흙 모래를 다량 황하로 유입시킨다, 황黃과 황湟의 음이 비슷하여 황하의 기원을 황수로 오해하기도 한다.
황하의 맑음과 탁함은 하남 하북 하서 하투 하삭 등의 지명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황하의 흐르는 방향이 지명에 영향을 주었는데, 감숙성의 하서주랑은 황하 서쪽지구라는 뜻이다.
하투지역에서는 황하가 세 번의 90도 방향 전환을 한다. 영하지역의 은천 이북에서 내몽고 탁극탁 이남 지역은 평원지대로 진한秦漢시기 하남지河南地라 하다 후에 하곡으로 개명됐다. 이 또한 황하의 흐름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하남성의 삼문협시에서 황하의 90도 방향 바꾸기가 또 일어난다. 황하가 진진 대협곡을 따라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용문에서 모여 나가다 진령산맥을 만나 방향을 동쪽으로 바꾼다.
또 태행산에 제지를 당해 거대한 3개의 물길을 만드는데 당나라 때 용문현이 설치되고 후에 황하도구黃河渡口라 했다가 섬서성 하진시로 개명됐다.
다음은 시간에 따른 지명 변화이다. 30년 하동 30년 하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물길 경계의 거대한 변화를 일컫는다. 진진 대협곡을 따라 흐르는 황하를 기준으로 강의 서쪽은 하서 동부는 하동이라 했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역을 담고 있다. 이 지역에 내재된 역사문화는 한겨레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한강이름은 백제인이 제일 먼저 불렀다고 하며 조선 후반부터 여러 지명중에서 한강이 대세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강 이름은 시대별 지역별로 다양했다. 고구려는 아리수 백제는 욱리하 신라는 왕봉하라고 불렀으며 고려는 열수라 했다. 서울 지역에서도 한강 용산강 서강으로 나눠 표현하였다.
또한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여 군사 경제 사회 외교등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한강 물의 색깔, 방향, 시간적 변화에 영향받은 지명은 없다. 조선시대 한양은 한강의 북쪽을 지칭하는 지리적 의미일 뿐이다. 다만 강변 곳곳에 있었던 마포나루 서강나루등 나루터 정도가 있을 뿐이다.
황하는 색깔, 방향, 시간의 변화를 지명 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그러나 정작 황하라는 이름을 직접 딴 지명은 없다. 한강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중심을 흐르며 수많은 역사를 품었지만, 그 이름을 지명에 남기지 않았다. 결국 황하와 한강은 사람들의 노래와 역사 속에서 이미지로만 기억되어 왔으며 지금도 잠잠히 흐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