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11화)
큰 강이 시작되는 지점은 매우 작아 주의하지 않으면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발원지를 지나 흘러가면서 주변의 크고 작은 물줄기를 받아들여 마침내 거대한 흐름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듬뿍 과시한다.
이처럼 큰 강의 만들어짐은 여러 물줄기의 합류에서 말미암다. 그렇다면 이런 합류 현상을 옛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 그 지역의 지명을 어떻게 이름 지었을까?
흥미롭게도 합류 지역의 이름을 정하는 모양이 한국과 중국이 다름을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어느 한 물줄기를 우선하여 이름을 짓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물의 합쳐짐 그 차체를 기억하였다. 그 사례를 보자.
장강은 중국에서 가장 큰 강으로 유역면적이 180만㎡로 황하 유역면적 75만㎡와 비교하면 장강은 황하보다 훨씬 많은 지류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강은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장강 상류는 금사강으로 사금생산에서 유래하였으며 삼국시기 금사강은 노수瀘水라 불러 노주를 설치했다. 운남 리강麗江은 금사강의 지류인 여수麗水에서 유래한다.
사천 지역의 장강을 천강川江이라 부른다. 이 지역의 물길은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삼협도 이 구간에 있어 강의 이름은 협강峽江이라고 한다. 천강은 장강의 목구멍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한漢 왕조 시기부터 사천 지역의 물자 운반 통로였다.
장강이 더 흘러 호북⁕호남 지역에 이르면 형강荊江이라 부른다. 이 구간의 물 흐름은 평온해져 호북성 의창에서 호남 악양 구간을 구곡형강九曲荊江이라 한다.
지형이 원만하고 물 흐름도 속도가 떨어져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장강은 낭만적인 강이 된다. 또한 높은 산이 없어 지명에도 릉陵 글자를 쓴다. 그래서 이백은 시에서 강릉(현 형주)을 노래하였다.
당구라산의 당곡當曲이 장강의 발원지이나 아주 오랫동안 장강 연안에 사는 사람들은 장강이 아주 먼 자연의 통로에서 나왔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장강의 기원을 한강이라 여겼으며 한강은 섬서지역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장강보다도 한강을 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한강을 좀 더 알아보면 섬서성 남부에 한중시가 있는데 이곳에서 한강이 유래한다. 춘추전국 시기 한중은 초楚 나라의 북쪽 경계이었으나 기원전 312 진秦 나라가 초를 멸망시키고 한중군 설치한다.
면현勉縣은 한강의 옛 이름인 면수沔水에서 유래한다. 또한 한강은 옛 문인들에게 노래의 대상이었다. 사천성의 민강을 장강의 발원지로 인식했던 적도 있어 북주 수당北周 隋唐 시기 민강 발원지에 강원현江原縣 설치하였다.
이러한 인식으로 강江과 한漢을 같이 썼다. 고서적에서 이야기하는 강은 한강을 말한다. 한강이 섬서성의 남부지역에서 동남방향으로 흐르고 호북성을 관통한 후 우한에서 장강에 들어선다. 즉 한강은 장강의 지류로 이곳에서 합류한다.
그런데 이 두 강이 합류되는 지명이 무한시이며 이 지역에 한구 한양구가 있는데 지명이 한강을 따랐고 장강을 딴 지명은 없다.
우리의 경우도 제법 굵은 물줄기들이 만나 큰 강을 만드는 경우가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경우 임진강과 한강의 만남 그리고 세 갈래 물이 만나는 대전의 삼천의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반도의 상징인 한강을 보자. 이 두 개의 큰 강이 합쳐지는 지점을 두물머리라 부르면 한자로는 양수리라고 한다.
그다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역은 파주 교하동이다. 세 번째로 대전의 3대 하천인 대전천 유등천 갑천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명을 세 갈래의 물이라는 뜻을 가진 삼천동(현 둔산동)이 있다.
모두 지명이 어느 강의 이름을 따지 않고 새롭게 이름을 지었다. 왜 그랬을까?
중국의 경우 둘 이상의 강물이 만나면 우선순위를 정하여 앞서 있는 강의 이름을 따랐다. 아마 서열을 따지는 중화주의 탓일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우리 조상들은 두 강의 이름이 아닌 제3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물의 서열을 정하기보다 서로 어우러지는 만남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