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드런스 트레인>을 보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칼을 휘두르는 적들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적이 찾아왔다.
굶주림과 가난, 질병이었다.
전란을 기록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城)은 무너지고 백성은 흩어졌으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거두어들이는 것은 없었다. 기근과 전염병이 함께 일어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고 굶주려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다. 사람의 도리가 다 없어지고 말았다."
패전국은 더 하다. 남편 혹은 아들을 전장에서 잃고, 배고픈 자식에게 줄 먹을 것이라곤 없으며, 나무껍질도 더 뜯어먹을 것이 없다.
이탈리아 영화인 <칠드런스 트레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미 산업기반을 갖추고 있어 먹고사는 것에 큰 걱정이 없었던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에 비해, 낙후된 남부사람들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남부지방은 길가의 고양이까지 잡아먹어 가축은커녕 쥐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대로 못 먹어 삐쩍 마른 아이들은 구두 닦는 기술을 배우느라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남부 엄마들은 당시 실제로 존재했다는 '행복열차'에 자신의 아이들을 태워 북부로 보낸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지만 기차는 아이들을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 공산당원에게 데려다줄 거고 당분간 잘 먹고 잘 가르쳐서 집으로 다시 돌려보낸다고 하니 내 아이가 잘 먹고 잘 지내다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눈물을 머금고 기차에 태웠던 것이다.
남편도 큰 아이도 잃은 아메리고의 엄마는 몇 날 며칠 고민 끝에, 하나 남은 아들 아메리고를 기차에 태운다.
아메리고는 북부에 도착해 적응하느라 며칠 고생은 했지만 잘 먹고, 학교에 가고, 옷과 신발을 신고, 따뜻한 집에서 잠을 자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북부의 안락함과 사람들의 따뜻함이 좋았다. 이탈리아 북부의 공산단원들은 단지 생물학적인 관계만 없을 뿐 정성을 다해 아메리고와 아이들을 돌봐주었던 것이다.
북부에서 아메리고의 보호자였던 데르나는 아메리고를 마음과 정성으로 돌본다.
생물학적 엄마는 아니지만 아메리고의 의식주,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는 시간들을 통해 아메리고의 엄마 못지않은 보호자가 되어 간다.
북부에서 바이올린까지 배우게 된 아메리고는 약속된 시간이 흘러 남부 엄마에게로 돌아가지만,
어쩐지 뭔가 달라져 돌아온 것 같은 엄마는 아들에게 서운하기만 하다. 그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였지만 그녀는 아들을 인간답게 살게 해 줄 능력 없는 무능에 대한 자책, 자괴감이 들었을 것 아닐까.
그래서 아메리고의 남부 엄마는 아메리고를 놓아준다.
비극적이고 잔인한 전쟁 이후 가난 밖에 물려줄 게 없던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고, 놓아주는 게 붙잡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아메리고가 결국 어느 엄마를 택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전쟁이 남긴 고통스러운 가난으로 사람들의 인생은 달라졌고, 가슴속 절절한 모성애를 꾹꾹 누르며 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엄마들과, 미래를 위해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혹은 버려짐을 받아들여야 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2025년에도, 전 세계 어딘가에는 전쟁이 남긴 가난으로 떠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전쟁의 이유를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더 커져서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
지금은 그 옛날 있었던 아이들을 위한 행복열차도 더 이상 없으니 아이들이 잠시라도 잘 먹고 잘 자고 학교에 갈 기획도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