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요가, 좋아서 하는 축구
현재 나는 요가를 가르치고 있다. 일주일에 네 번. 한 번은 우리 집에서 하는 지인들 수업, 그리고 한 번은 요가 스튜디오에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은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이다.
연주하지 않던 악기들을 팔다
요가 수업을 시작하고 반년 동안 우리 집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물건으로 꽉 차 있던 패밀리룸은 헐렁한 요가 공간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사용하지 않던 수많은 물건들을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에 팔았다. 사실 내가 판 건 아니고 큰애가 자기 페이스북에 올려서 팔아 주었다. 처음엔 내가 혼자 중고 사이트에서 팔아보려 했는데 첫날부터 사기를 당할 뻔했다.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내 신용카드 정보가 필요하다고 해서(쓰고 보니 이 말에 넘어간 내 자신이 정말 한심하다... 에휴...) 카드번호를 알려주려 했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그 순간 우연히 내 옆에 있던 큰애가 뭔가 이상하다고 나를 멈추게 한 것이다.
큰애: 엄마! 잠깐만요! 엄마 뭐 또 사요?
나: 엄마가 뭐 맨날 사기만 하는 사람이니? 이번엔 파는 거야.
큰애: 근데 엄마 카드 정보를 왜 줘요? 엄마는 돈을 받는 사람인데.
나: (적막)
12학년, 한국으로 치면 고 3인 큰애는 내 손에서 핸드폰을 뺏었다. 그리고 나를 긍휼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자신이 대신 팔아줄 테니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곤 대학 원서를 쓰느라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내 물건들을 사진을 찍어 자신의 페이스북 마켓 플레이스에 올렸다. 평소엔 입시 준비도 안 하고 축구만 해서 걱정시키던 꼬맹이가 갑자기 다 큰 어른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커버린 큰 아이한테 나는 매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갑자기 커버린 우리 큰애
큰애: 엄마, 이 화분 얼마에 올릴까요?
나: 이거 이백불에 산 거니까, 한 육십 불에 올려봐.
큰애: (적막)
나 : 너무 비싼가? 그럼 오십 불?
큰애: (다시 적막)
나: 왜?
큰애: 엄마… 화분을 이... 이백불에 샀다구요?
나 : 응. 왜?
큰애: 왜 산 건데요?
나: 대파 심으려구. 근데 잘 안 됐어. 자꾸 말라죽더라고.
큰애: 아니 엄마! 달러샵에 가면 오불짜리 화분도 얼마나 많은데...
나 : 야! 그거랑은 다르지. 이 화분이 훨씬 예쁘잖아.
큰애: 엄마! 대파값 아끼자고 이백 불짜리 화분을 샀다구요?
나: (아주 긴 적막)
그 이후 장식장을 팔 때도 램프를 팔 때도 똑같은 패턴의 대화가 오갔고 나는 그때마다 큰애한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뿐이랴.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대화를 듣던 남편은 매번 달려와 “아니 뭐라구? 화분 하나에 이백불을 주고 샀다고? “라며 살포시 추임새를 넣곤 했다.
이젠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결제 전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부터 돌려본다. 큰애로부터의 잔소리 10분, 그 10분 보다 더 얄미운 남편의 추임새 1분, 광내고 닦아 사진 찍어 올리고 구매자를 기다리고 또 그 구매자와 가격 흥정하고 가끔 사갔다가 변심한 고객님께 다시 환불까지 해드려야 하는 그 자리한 과정들을…
그 과정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간절하다면 스텝 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두 번째 단계는 결제 전에 한 달 정도를 기다려 보는 것이다. 한 달 동안 그 물건 없이 지내보면서 정말 그 물건이 없으면 안 되는지 자체 테스트를 해본다. 이런 두 단계를 모두 거쳐 살아남은 물건에게만 마지막 '결제하기' 버튼을 하사한다.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장바구니에 있었던 물건들 대부분은 사라진다. 룰루레몬 장바구니에서 ’내돈내산‘을 기다리고 있던 깔별 레깅스 아가들도 그 버튼은 받아내지 못했다.
치지 않던 젬베도 팔았다
그런 시간들을 겪으면서 우리 집은 조금씩 여백이 생겼고 숨통이 트여갔다. 아무도 치는 사람이 없어 사이드 테이블처럼 사용되던 젬베는 이 동네 젬베 동아리 회장님께서 보듬어 안아 가셨다(우리 애기... 이쁨 받으며 잘 살고 있지? 흑흑 ㅠㅠ).
하지만 풍금은 놔줄 수 없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 게스트룸에는 풍금과 젬베가 있었다. 젬베는 팔렸고, 풍금은 당연 팔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나는 풍금이 있는 게스트룸을 ‘풍금방’이라 불렀고, ‘풍금‘ 발음이 어려운 우리 딸은 ’풍금방‘을 ’푸근방‘이라 불렀다.
남편도 자신의 물건을 줄였다. 절대 안 된다고만 하더니 이번엔 자기 서재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TV를 파는 데 동의해 주었다. 그렇게 남편 서재에도 빈 공간이 생겼고, 그 공간으로 내 풍금을 옮겼다. 그래서 일하다 쉴 때 가끔 넷플릭스를 보던 남편은 이젠 강제로 내 풍금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 풍금방에 있던 풍금은 음악이 필요한 남편에게로, 젬베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두드려 줄 젬베 동아리 회장님에게로 갔다. 마지막으로 풍금방엔 새빨간 암체어만 남았다. 이 암체어까지 패밀리룸(현재의 요가룸)으로 보내봤다. 풍금방이 텅 비었다.
너무 비웠나…
푸근방이 하나도 안 푸근한데?
너무 휑해진 것 같아 이번엔 패밀리룸에 있던 소파와 테이블을 풍금방으로 옮겨 보았다. 꽤 덩치가 큰 소파와 테이블인지라 옮기기 전엔 이 작은 풍금방에 얘네들이 어울리려나 살짝 걱정했었다. 근데 막상 옮겨 놓고 보니 이 녀석들 사실 덩치만 컸지 여전히 아가들이다. 엄마 자궁 같은 풍금방에 쏙 안겨 있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우리 딸은 풍금이 떠나고 없는 이 방을 여전히 푸근방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긴 현재 우리 딸과 강아지의 독보적인 최애 공간이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우리 가족이 꽉 쥐고 있던 악기와 물건들은 자기들에게 더 어울리는 푸근한 장소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끝까지 놔줄 수 없었던 트럼펫
우리 애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트럼펫을 불었다. 그냥 부는 정도가 아니고 거의 이건 뭐 트럼펫의 정령이었다. 4학년 밴드 첫 시간부터 우리 아이는 압도적으로 밴드부에서 퍼스트 트럼펫이 되었다.
밴드 선생님: 한 번 불어볼까?
큰애: 어떻게 부는지 모르는데요?
밴드 선생님: 아랫배에 힘을 주고 호흡은 최대한 길게.
큰애: 뚜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웃!!!
밴드 선생님: 오! 골져스! 마뷸러스! 너 마라톤 하니? 폐활량이 엄청 나구나.
큰애: 아뇨. 축구하는데요.
밴드 선생님: 잘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축구 열심히 하렴. 그럼 다음 마디도 이어서 해볼래?
큰애: 저 악보 볼 줄 모르는데요.
밴드 선생님: (적막) 괘...괜찮다. 축구만 안 관두면 돼.
트럼펫의 헤라클레스가 되다
이렇게 우리 아이는 축구공과 함께 했던 시간들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첫날부터 트럼펫의 정령이 되었다. 해마다 우리 애는 축구를 더더 좋아했고, 덕분에 폐활량은 더 늘어서 이젠 트럼펫의 정령이 아니라 이건 뭐 트럼펫의 헤라클레스가 되어 있었다(엄마의 콩깍지 아니냐고? 백 프로 만 프로 인정!).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퍼스트 트럼펫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아이의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마냥 행복해했다. 거기다 매년 가을밤 학교 잔디밭에서 재즈 공연을 했는데 8학년 때 우리 아이가 연주했던 브루노 마스의 업타운 펑크는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너무 멋졌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큰 아이는 트럼펫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기는 트럼펫이 이제 재밌지 않다고...
나: 아니, 왜 안 해? 그렇게 잘하는데?
큰애: 하기 싫어요.
나: 미국에선 밴드 활동 같은 거 해야 대학 갈 때 유리한 거 몰라? (아... 쓰고 보니 나 꽤 후진 엄마였다)
큰애: 재미없어요.
나: 너 잘하잖아.
큰애: 전 축구가 더 좋아요.
나: 너 축구 잘 못하잖아!!!
큰애: 엄마! 잘 못하면 좋아하는 것도 안 돼요?
나: (적막)
잘 못한다 ≠ 좋아하면 안 된다
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래도 나중에 마음 바뀔 수 있으니 트럼펫은 잘 가지고 있어."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우리 애의 트럼펫을 어루만지며 브루노 마스의 업타운 펑크를 혼자서 듣곤 했다.
우리 애의 페이스북 계정을 보고 물건을 사러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을 오가던 그즈음. 평소처럼 업타운 펑크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부부처럼 보이는 두 어른과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문 앞에 서있었다.
나: 누구세요?
부부와 아이: 트럼펫 사러 왔는데요.
나: 네? 트럼펫이요?
부부와 아이: 네. 트럼펫이요.
나: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만요.
큰 애: (발로는 축구공을 굴리면서 한 손으로 번쩍 트럼펫을 들고 나온다) 엄마! 맞아요! 제가 올렸어요.
나: 아니 왜?
큰애: 불지도 않는 트럼펫 뭐 하러 가지고 있어요. 필요한 사람한테 가야지.
큰애는 문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트럼펫을 쥐어 주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트럼펫을 받았다.
큰애: 한 번 불어볼래?
10살 소년: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어떻게 부는지 모르는데요...
큰 애: 아랫배에 힘을 주고 호흡은 최대한 길게.
10살 소년: ㄸ...ㄸㅡㅡ... (고개를 떨군다)
큰애: (아이의 어깨를 푸근하게 토닥인다) 괜찮아. 오늘부터 축구하면 돼. 이 축구공은 덤으로 줄게.
Without music, life would be a mistake
- Friedrich Nietzsch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