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에 늑대 자세가 없는 이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by 사막의 요기

봄이 오면 인터뷰 기회를 준다던 그 이메일. 그건 진짜였다. 정말로 봄이 되자 나에겐 인터뷰와 데모 수업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도 초등학교와 요가 스튜디오 두 군데서나...


사람들은 "땡큐 포 어플라잉 쌸라쌸라“는 미국에서 이력서를 퇴짜 놓는 세련되고 흔한 표현이라 했고,

‘in the spring’에 기회를 주겠다는 말은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의 봄쯤 연락을 준다는 ’으른‘식 정제된 표현이라고 했다.



근데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은
자신의 마음을
돌려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진짜 고마워서 '땡큐 포 쌸라쌸라'인 거고
진짜 봄에 기회를 주려고
‘in the spring'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렇게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의 마음을 돌려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던 날 아침. 큰애는 평소처럼 포켓몬 캐릭터(우리 애 고딩임. 초딩 아님)가 그려진 자신의 백팩을 둘러매고는 이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학교에 가져갈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나: (웅얼웅얼거리며 예상 질문에 답하는 연습 중)

큰애: (물통에 물을 채우다 말고 이어팟을 귀에서 뺀다) 엄마, 지금 뭐해요?

나: 오늘 엄마 잡 인터뷰 있어. 예상 질문에 답하는 거 연습 중이야. 엄마 영어 발음 어때?

큰애: (적막)

나: 왜? 발음 이상해?

큰애: 네.

나: 야!!!

큰애: 발음 좀 틀리면 어때요. 그냥 엄마 말하고 싶은 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오면 돼요.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고 자유롭게. 요가가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나: (눈물이 핑 돈다) 아이구. 우리 애기 다 컸네. 언제 이렇게 컸담. 엄마가 한 번 안아 보자.

큰애: (으르렁거리며 도망간다)




남편은 나를 인터뷰 장소까지 데려다주었고 들어가기 전에 한인마트에서 사 온 찹쌀떡을 내 입에 넣어 줬다. 그렇게 나는 두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인터뷰를 봤다. 인터뷰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서 보니 남편은 양손으로 벽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맞다. 엿이었다. 그것도 빅 엿...

남편은 내가 인터뷰를 보는 동안 밖에서 벽에 엿을 붙이고 있었다. 아 창피해…



나: 뭐 해?

남편: (화들짝 놀라며) 깜짝이야.

나: 뭐하냐고?

남편: 시험 볼 땐 이런 거 하는 거야.

나: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 본다) 사람들 보잖아.

남편: 볼 테면 보라지! 인터뷰 어땠어? 잘 봤어?

나: (침울한 척하며) 몰라…

남편: 왜?

나: 꽝이야.

남편: 괘… 괜찮아. 에잇. 여기 사람 보는 눈 진짜 없네. (벽을 발로 꽝 찬다.)

나: 꽝이라고! 꽝!

남편: (벽을 더 꽝꽝 찬다) 가자 가! 침 뱉어 침! 퉷! 퉷! (인터뷰 장소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에잇! 엿 먹어라!!!

나: 꽝이 영어로 뭐였는지 기억나?

남편: ...

나: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몇 달 전에 그랬잖아. 내가 전에 받았던 이메일에 'in the spring'... 그거 '꽝'이라는 뜻이라고... 근데 'spring'은 진짜 말 그대로 '봄'이었어. 봄 학기에 나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애!

남편: (아이처럼 좋아하며) 거 봐! 역시 엿 붙여야 된다니까.

나: (단호한 표정으로) 빨리 다 떼! 그리고 누가 학교 벽을 그렇게 발로 차냐? 신발 자국이랑 침도 다 닦아!

남편: 네



이렇게 난 이 두 사람의 세련되지 못한 응원을 받으며 인터뷰와 데모 수업까지 통과했고, 그 결과 난 그 두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이름을 찾았다(쓰고 보니 좀 웃기긴 하다. 찾긴 뭘 찾아... 이름이 뭐 잃어버렸던 필통도 아니고...)


미국에서의 십 년 동안 난 우리 애들 학교에서건 동네에서건 남편의 성을 따라 Mrs.OO로만 불려 왔다. 하지만 내 요가 매트 위에서만은 난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남편의 성(family name) 없이 내 한국 이름 그 자체로 나를 부른다. 초등학교에서도 또 요가 스튜디오에서도 사람들은 내 이름 그대로 나를 불러준다. 한국 발음에 익숙하지 않던 여기 사람들도 몇 달 지나니 이제는 내 이름을 곧잘 발음한다. 물론 십 년이란 시간 동안 Mrs.OO에만 너무 익숙해졌었는지 처음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그게 나를 부르는 거였는지 모를 때도 많았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다시 읽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중학생쯤이었던 것 같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번역된 제목으로만 읽었다. 한국어 제목 옆에 영어 원제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님 아마 있었어도 못(?) 읽었을 수도 있고...


암튼 그때 나는 이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주인공 남자라고 등장하는 히스클리프(Heathcliff)는 너무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일단 이름부터가 전통적인 안정감이라곤 없었다. 에드워드, 세바스찬 뭐 세련된 인싸 이름 많잖아. 왜 이렇게 이름이 이방인 느낌이야... 거기다 캐서린의 아빠가 밖에서 주워 온 아이라 성(family name)도 없다. 도대체 이 책이 왜 유명한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여자 주인공 캐서린 언쇼(Cathering Earnshaw)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이 책을 격정 로맨스(?)쯤으로 해석했고 캐서린이 자신이 한 때 그토록 사랑했던 히스클리프를 배신하고 결국 돈과 좋은 배경을 가진 에드가 린튼(Edgar Linton)을 선택하는 장면에선 너무 화가 나서 책장을 덮고 혼자 으르렁거렸다.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를 만날 수 있다면 따지고 싶었다. 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배신했냐고... 결국 캐서린도 다른 뻔한 여자들처럼 돈 없고 빽 없는 히스클리프를 배신하고 집안 빵빵한 린튼을 선택한 거냐고... 당신의 이 책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신이 살던 영국뿐 아니라 이 먼 한국에서까지도 추천 도서인 건 아냐고… 책임지라고…둘은 정말 사랑했는데 왜 두 사람은 결혼도 못하고 캐서린은 결국 죽냐고... 폭풍의 언덕. 이거 너무 비극 아니냐고...



지금 내 손 위에 있는 책에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번역 없이 ’Wuthering heights'라는 원제목만 써있다. ’Wuthering heights’와 ’폭풍의 언덕'이라… 직역하면 두 제목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근데 두 제목 왜 이렇게 같은 듯 다른 느낌이지? 제목만이 아니다. 30년 사이에 내용도 바뀌어 있다.



이상하다.
이거 원래 폭풍우가 몰아치는 언덕에서
두 남녀가 격정적으로 사랑하다가
여자가 남자 배신하고
결국 그 여자가 죽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내 눈엔 남자도 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에서 두 남녀가 격정적으로 사랑하는 공간인 '폭풍의 언덕'도 안 보인다. 지금 내 눈엔 캐시(Cathy)만 보인다. 캐시(Cathy)는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불렀던 이름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언쇼(Earnshaw)가의 딸이었을 때도, 또 나중에 린튼(Linton)가의 아내였을 때도 평생 그녀를 성(family name) 없이 그냥 캐시(Cathy)라고만 불렀다.


30년이란 시간 사이에 내 눈이 많이 늙었나 보다... 캐시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혹은 누구의 아내인지, 얼마나 재력 있고 배경 빵빵한 집안의 여자인지를 보여주는 언쇼, 린튼 같은 이름은 나에겐 읽히지 않는다.


지금 내 나이에는
뭐든 살짝 멀리서 바라보는 게
오히려 잘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니 온몸에 먼지를 묻히고 Wuthering heights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두 마리 늑대, 캐시와 히스클리프가 보인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서니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한 몸이 된다. 히스클리프 없인 캐시가 없고 캐시 없인 히스클리프도 없다. Wuthering heights는 격정적인 로맨스의 장소가 아니라 캐시가 히스클리프이고 히스클리프가 캐시였던 공간이고, 또 공간과 동시에 그러한 야생이 허용되던 시간이다. 그 야생이 허용되고 인정되던 시공간 말이다. 격정 로맨스의 공간이 아니라...



30년 전 에밀리 브론테에게 으르렁대던 중2병 환자는 이제 없다. 작가님을 만나게 되면 이젠 다른 대화를 할 것 같다.



나: 작가님! 혹시 그곳에서 소식은 듣고 계신가요? 이 먼 곳 한국 도서관에도 작가님의 책이 꽂혀 있답니다. 그거 아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인 거?

에밀리 브론테: 땡큐 포 쌸라쌸라

나: 유아 웰컴. 저 근데 작가님 책 제목이요… 한국에서는 ‘폭풍의 언덕'이라고 번역했다요…

에밀리 브론테: 오… 댓츠 놋 댓 쏘오트풀(작가님 영국분이심)

나: 그죠?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저 한 가지 개인적인 질문 해도 돼요?

에밀리 브론테: 쏘튼리

나: 혹시 작가님 타살되신 건 아니죠? 언니 샬롯 브론테가 죽였다는 말이 있던데.

에밀리 브론테: 스토핏!

나: 뭐 나 보고 stupid? 작가면 다야?

에밀리 브론테: 아 답답해, stupid이 아니라 stop it. 영국식 발음 몰라?

나: (으르렁거린다) 여기 미쿡이라구욧! 스따삣!!!




오늘도 나는 나의 요가 매트, Wuthering heights를 편다. 그리고 앞으로 한 시간 동안 나는 캐시(Cathy)이면서 동시에 히스클리프(Heathcliff)가 된다. 나의 Wuthering heights, 이 매트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언쇼(Earnshaw) 일 필요도 린튼(Linton) 일 필요도 없다. 그저 온몸에 땀과 먼지를 묻히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나는 그냥 한 마리 늑대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요가하다 말고 수업 시간에 가끔 나에게 묻는다. 왜 늑대 자세는 안 가르쳐 주냐고... 개, 고양이, 소, 사자, 호랑이, 비둘기 등등 그 많은 동물 자세는 배우는데 왜 늑대 자세는 안 배우냐고... 그럼 난 웃으며 대답한다.


You don't have to learn to be a wolf
- you already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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