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의식(儀式)
매년 봉숭아 물을 들였었다.
길가에 피어있는 봉숭아를 서리(?) 해서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곤 했다.
작년엔 직접 봉숭아를 심어 꽃까지 피웠지만, 엄마가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가신 후 작업실에 버려진 봉숭아도 함께 떠났다.
그게 벌써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
봉숭아는 음력 5월경에 물들인다는 유래가 있는데 봄에 일찍 심어 6, 7월 경이면 꽃이 피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7월 초 길가에 활짝 핀 봉선화를 보았고, 뒤늦게 생각나 봉선화 씨를 사서 심은 것도 7월이었다.
늦은 파종으로 봉숭아 씨앗 5개를 심었지만, 콩나물처럼 웃자라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봉숭아 물을 들여야 할 시기에 봉숭아를 심었으니 제대로 클리가 없었다.
올해는 봉숭아 물들이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길가에 아직 건재한 봉숭아들이 많았다.
9월 말인데 꽃은 물론 열매도 많이 달고 있었다.
내년을 기약하며 봉숭아 씨를 받아 가려고 열매를 따자 톡 하고 터지는 씨앗들.
아, 노래에도 있었는데, 손대면 톡 하고 터진다고...
엄마가 있는 추모공원 주변에 농가에도 아직 봉숭아가 자라고 있었다.
도심이 아니라 그런지, 손대는 이들이 없어서 그런지 봉숭아가 엄청 크게 자라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꽃과 잎 그리고 씨를 받아가지고 왔다.
엄마도 없고, 나 혼자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다.
혼자서도 충분히 들일 수 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는 빼고..
크리스마스 때까지 봉숭아 물이 손톱에 그대로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던데, 지금 들였으니 12월은 물론 내년까지도 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 첫사랑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잘 살고 계시고, 나도 그런 속설을 믿을 나이는 이미 지났다.
그래도 가을을 맞아 손톱에 봉숭아 물들이는 일은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