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수록 경쟁에 내몰리고, 나이 들수록 약에 의존하며, 말년엔 병에 시달리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런 우리에게 맨발 걷기는 어떤 의미인가.
몸과 마음을 챙긴다는 가치? 중요하다.
말기 암을 이겨냈다는 희소식? 물론 좋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챙기고 병을 이겨냈다는 희소식만으로, 맨발 걷기를 모두 담아낼 순없어 보인다. 그 이상을 내포한다.
그럼, 맨발 걷기 너머에 우린 무얼 보았나? 그건 희망이다.
맨발 걷기 광풍 너머에 우린 무얼 느꼈나? 그렇다. 희망이다.
우린 맨발 걷기를 통해 희망을 보았고, 희망을 쏘아 올렸다. 단지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을 뿐인데, 생각지도 않은 희망이란 선물까지 받아 든 셈이다.
현대인은 수많은 약에 의존한다. 아프면 약을 당연시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물음표를 던지지 않았다. 신발을 당연히 여겼던 것처럼 약과 병원 진료도 그런 존재였다. 혈압이나 당뇨만 하더라도 평생 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게 우리네 선입관이다. 으레 나이 들면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지병으로 간주한다. 약을 끊으면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맨발 걷기를 통해 몇십 년 앓던 당뇨와 혈압 등 크고 작은 병들을 치유했다는 수많은 사례를 보면서, 본인 의지에 따라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쏘아 올렸다. 우리 몸에 약이 전부가 아니란 걸 분명히 보여줬다. 맨발 걷기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듯, 약도 모든 병에 근본적인 치료제가 아님을 명확히 했다.
혹자는 묻는다. 쉬엄쉬엄 걷는 걸음에 무슨 희망씩이냐고.
치유 사례와 체험담에 나오는 그분들의 언어. 그분들의 눈빛. 그분들의 진심. 그분들의 걸음에서 희망을 읽었노라고. 단언컨대, 희망이 녹아 있기에 가능한 걸음이자 진심이고 눈빛이며 언어다.
이런 희망이란 무지개 뒤엔 "절실함"이란 탄탄한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즉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핵심 모멘트는 희망과 절실함이다.
어싱족은 365일 매일 걷는다. 폭염과 강추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청춘남녀 연애 날짜 새기듯,
맨발 걷기 첫날과 기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건 기본이다. 묻게 된다.
이렇듯 중장년층을 매일 산과 바다, 운동장으로 끌어들인 까닭은 무엇일까.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정은 어디서 나올까.
희망과 절실함을 꼽는다.
유산소 운동에는 만 보 걷기, 등산, 단축 마라톤, 에어로빅, 수영, 사이클 등 다양하다. 이런 어떤 운동도 맨발 걷기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 있는가? 없다.
왜일까? 절실함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여타 운동은 건강을 지키는 일종의 힐링이다.
단순히 건강을 위한 몸놀림이다.
간절함까진 없다. 그러나 맨발 걷기 탄생 배경에는 절실함이 자리한다. 살기 위해 걷는다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이런 절실함에 뿌리를 두기에 다음과 같은 에너지가 생긴다.
맨발로 마음마저 힐링 된다는데, 매일 땅에 딛는 게 대수겠는가.
맨발로 숙면하고 혈액 순환이 잘된다는데, 그깟 걷기 몇 시간이 대수겠는가.
맨발로 병이 낫는 희망을 품는데, 남들 시선이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거기에다 절실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는겨울철이다. 구멍 뚫은 양말, 양말 위에 핫팩, 전도체 넣은 신발, 구리 감은 스틱, 영하 10도의 살을 에는 삭풍을 맞아가며 걷는 광경 등.
이런 천태만상 행동들을 어찌 해석할 건가.
단지 알량한 책상머리 의학 지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가.
왕왕 맨발 걷기 효과에 부정적인 언론 기사를 접한다. 내용인즉슨 왜 멀쩡한 숲길을 큰돈 들여가며 갈아엎느냐다. 한순간 유행이라 치부하면서.
어싱족에겐 한낱 영혼 없는 얘기로 들릴 뿐이다. 이유는 단순한 건강 지킴이와 유산소 개념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유산소 운동이 힐링에서 시작한다면, 맨발 걷기는 절실함이 출발점이다. 유산소 운동과 맨발 걷기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맨발 걷기는 절실함에서 바라봐야 공감되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