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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만 Sep 07. 2024

숲속 맨발 걷기로 만든 책

산과 들판이 도서관이자 서재며 책

맨발로 찾는 숲은
나만의 도서관이고 서재며 책이다.
산과 들판이 도서관이자,
산허리 감아 돌아 산들바람 머무는 곳이 서재며,
마주하는 수목은 한 권의 책과 진배없다.

숲을 책으로 형상화하고 각색해 본  있는가?

산어귀부터 지천으로 핀 꽃은 글감이요,
줄지어 선 편백과 소나무는 이야기의 뼈대를 연상시킨다.
한 권의 책이 갖는 주제가 심금을 울리듯
꽃이 지닌 향도 그러하다.




24년 여름의 초입,

평소 걷던 길섶에 치자꽃이 만발했다.

수도 없이 지나친 길인데 보이지 않던 꽃이다.
맨발의 여유를 지녔기에 보였지 싶다.

치자에는 본디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순백색 꽃답게 순결, 청결, 한없는 즐거움이란
꽃말과 달콤한 향을 자랑한다.  
그 꽃에, 그 꽃말에, 그 향기다.
세상 살면서 처음으로 치자에 코끝을 가져간다.
몸놀림은 두둠칫, 눈은 지그시 감고서.
순백의 치자 향이 그윽하다.

꽃은 꽃대로,
책은 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그 무엇도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본성을 갖고 있다.
더하거나 뺄 필요 없이.


치자꽃에 향이 부족하다 하여 향수를 뿌릴 순 없지 않은가.
샤넬을 통째 뿌린들 치자가 지닌 향을 대신할 수 있을까.
달라질 리 만무하다.
오늘따라 제 나름의 향을 지닌 치자꽃이 신비롭다.

치자 향을 음미하며 맨발로 딛는 첫 페이지는
살랑거리는 바람결로 써 내려간다.
다음 페이지는 지저귀는 산새 소리로.
그다음은 햇살 머금은 동사로.
에필로그는 석양에 물든 형용사가 제격이다.




산마루에 올라서자
편백 사이로 짱짱한 햇빛이 반긴다.

글발이 샘솟는다.
파란 쪽빛 하늘과 초록 숲이 건네는  때문이리라.

책상에선 구만리로 헤매던 문맥들이
줄지어 선 편백처럼 반듯반듯 정렬된다.

가다듬을 맥락이 무엇인지,
고칠 데가 어디인지 한눈에 쏙쏙 들어온다.

맨발로 오르는 숨찬 언덕배기는 스토리 속 절정을 치닫는다.
경사진 언덕은
자신의 무딘 지성을 깨우는 촉매로서 손색없다.
지치고 색감 없는 감성을 생동감 넘치는 컬러로 디자인하는 건 물론이고.

고갯마루 지나 쉼터
혼자 즐기는 사색의 공간이다.
바위에 새길만한 지혜와 현자를 만나는 호사를 누린다.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설파한 "소크라테스"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그의 각주일 뿐이라는 "플라톤"

인간의 본성을 관통한 "마키아벨리"를 대면하기 좋은 시간이다.




쉼터에서 숨을 고른 후다.
느릿느릿 몇 걸음 올라서면 대부분 산이 그러하듯
탁 트인 전망 마주한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향긋한 바람에

어느행복감이 밀려 든다.

이른 봄날 부는 소소리바람
여름의 하늬바람.
초가을날 불어오는 강쇠바람.
한겨울 세찬 댑바람을 따지지 않고 싱그럽다.

이런 바람결에 내 마음을 실어 보내면
딱딱한 문구는 유려한 문장으로 화답한다.
복잡한 단어들의 조합은 매끈한 문맥으로 변하고,
엉킨 문단들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책상에서 막힌 구절은 산책과 함께 완성했고,
대부분은 숲속 명상을 통해 써 내려갔다.
속칭 막힌 곳을 뚫어주는 "뚫어뻥"이다.

어디 글뿐인가.
눈을 감고 산천초목에 몸을 맡기는 순간,
머릿속 혼잡한 생각은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반짝인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람 간 꼬인 관계는 좀체 해결되지 않는 게 세상사다.
뒤돌아보면 별것 아닌 일로 목숨 걸듯 달려드는 우리네 삶이다.
이런 엉킨 감정의 필터링 역할을 숲은 톡톡히 해낸다.
거기에 맨발 걷기를 더하면,
어느덧 평온한 마음으로 자리한다.
단지 호젓한 숲길을 맨발로 거닐었을 뿐인데.




숲은 편백이 늘어섰든,
소나무가 들어찼든,
울창한 그늘이 있어야 제맛이다.
이런 선선하고 편한 곳에서는 내친김에 퇴고까지다.
다 왔다고 생각하는,
다됐다고 여기는,
이젠 됐다 읊조리는 그 지점이 퇴고할 타이밍이다.

그런 후 마지막 책갈피까지 치자꽃으로 물들이면,

보기 좋고 읽기 쉬운 컬러판으로 인쇄된다.
소장하고 싶은 고급 양장본으로 탄생하는 셈이다.


숲이 선사하는 치유력은,
몸과 마음뿐 아니라 글에서도 명징하다.
몸은 치유되고,

마음은 정화되며,

글의 단락은 완성된다.

숲속 맨발 걷기가 주는 완벽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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