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의류건조기에 문제가 생겨 A/S 신청을 했다.
단순하게 서비스 기사님이 출장 수리를 하면 해결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객센터 상담자의 답변은 나의 예상과는 달랐다.
해당 제품을 공장으로 싣고 가서 수리 진행을 해야 한다며 수거 방문 날짜를 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달리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 과정들의 번거로움을 예상하니 몸이 후욱 달궈지는 듯했다. 사실 앞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리 집의 건조기와 비슷한 이상증세를 보인다는 유형의 글들을 찾아보았다.
한결 같이 제품을 서비스센터로 가져가서 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했었다.
보름 남짓을 기다려 큰 트럭에 건조기를 실어 보냈다.
창고에 넣어 두었던 스테인리스 재질의 빨래건조대를 꺼내 마당에 펼쳐놓았다.
'양팔 벌려 나란히' 펼쳐진 채로 세척을 한다. 당분간 건조기를 대신해 줄 녀석이다.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철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오랫동안 산화되어 녹슨 부분을 닦아내니 은빛 속살이 드러난다.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네가 이렇게 또 볕을 보고 바람을 맞는구나!”
은빛 건조대가 햇빛에 반짝거리고 부딪히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아롱진다.
혹시나 하고 버리지 않고 담아놓았던 것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건조통 안의 뜨거운 열기 대신 바삭한 햇빛에,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회오리 기계 바람 대신 살짝 에둘러 가주는 바람결에 우리 집 옷들도 잠시 숨을 쉬겠다 싶어 피식 웃고 만다.
생각해보니, 늘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몇 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나는 조그만 마당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항상 허공을 가르는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노란 구리선을 굵게 감고 있는 까만 전선줄로 양 끝을 처마에 매달기도 하고 주황색 나일론 끈으로 빨랫줄을 만들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 남편, 개구쟁이 아들 녀석 둘의 빨래는 적지 않았으니
하늘과 실뜨기라도 하려는 듯, 빈 공간만 보이면 빨랫줄을 걸었다.
그리고 널려진 빨래들 사이에는 늘 나의 목폴라 티셔츠와 예식 신부용 하얀 장갑이 널려 있었다.
삶아 빤 듯한 새하얀 수건도 바람에 흔들리며 우리 집 마당에 바람길을 내주었다.
겨울에는 까만색, 그 외의 계절에는 하얀색 목폴라 티셔츠였다.
이 스냅사진 같은 장면은 25년 전 내가 캐디라는 직업을 시작하던 때의 우리 집 담장 안의 정경이다.
마치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덕선이가 살던 쌍문동 골목 안 풍경처럼 널려 있던 옷들만 봐도 그 집의 주인장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애들이 많은지 적은 지, 살림살이는 어떨지 대략 알 수 있었다.
1997년 모든 게 푸르던 봄에 나는 캐디라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내 나이 스물여섯...
내 나이도 푸르렀고, 난생처음 발을 내디뎠던 골프장의 잔디와 나무는 더욱 새파랗고 싱그러웠다.
그 당시는 보기에도 아까운 그 잔디 위를 직접 캐디들이 작은 수레 모양의 카트에 고객의 골프백을 1개 내지는 2개를 싣고 직접 끌어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18홀 코스를 내 발로 오롯이 모두 걸어야 끝이 나던 일.
18홀이 대략 7~8킬로미터 정도 되니 36홀, 45홀을 하루에 걸으며 끌며 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딱 한번 나는 54홀을 걸어본 적도 있다)
끝없이 펼쳐진 그린카펫은 누군가에겐 설렘으로 벅찬 유희의 플로어(Floor)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삶의 수레바퀴를 수없이 돌려야 하는 힘에 벅찬 노동의 플로어였다.
목을 감싸는 티셔츠와 하얀 수건, 흰 찔레꽃 장갑은 그 당시 캐디들이 착복하거나 휴대해야 하는 물품이었다.
일 년 내내 목을 감싸는 티셔츠에 회사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는다.
여름엔 뜨거운 자외선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해 줄 챙이 큰 모자를 쓰고, 겨울에는 북풍한설을 막아내기 위해 일명 군밤장수 모자라 하여 눈과 입만 가리지 않는 복면형 모자를 써야 했다. 방한용 내피로 일명 '군대 깔깔이'를 입기도 했다.
모자 안에는 큰 손수건으로 두건을 만들어 쓴다. 여름에는 흘러내리는 땀을 일차적으로 흡수해주는 기능도 하고, 삐져나오는 잔머리를 정갈하게 정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머리가 긴 사람들은 반드시 머리를 묶고 머리망으로 감싸야한다.
매니큐어, 귀고리, 반지, 안경은 착용할 수 없었다.
아마 서비스 업계의 품행 단정 항목이었을 것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나는 매일 렌즈를 끼는 일이 힘들었다.
자주 결막염에 걸리다 보니 눈의 상태는 나빠져 더 이상 렌즈를 착용하면 안 된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시력교정용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허용이 된다.
자외선과 바람을 막아주는 고글도 착용할 수 있으니 참 격세지감이다.
플레이어들의 흙이 묻은 볼을 닦아야 하는 타월은 흰색이었다.
지금은 현장에서 초록색의 타월을 사용한다.
면은 기본이고 흡수력이 좋은 극세사 타월까지 그 재질과 크기 또한 다양하다.
왜 그때는 하얀색 수건이어야만 했을까?
흰색 타월은 캐디 자신의 일종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one bag시스템(캐디 1명이 플레이어 1명을 담당하는 것. 한 번 라운딩에 보통 4명의 캐디와 4명의 플레이어가 한 팀이 되어 플레이한다.)에서 신입캐디는 그늘집(플레이 중간 쉼터)마다 선배들의 타월을 모두 걷어서 깨끗하게 빨아야 했다. 이는 겨울에도 거를 수 없는 업무였다.
쉬는 날이면 ‘옥시크린’ 세제와 뜨거운 물로 흰 수건과 장갑을 삶아 빨아 햇빛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하얗게 하얗게’ 준비하는 의식을 하는 날이었다.
예상컨대, 캐디가 있는 집에는 양은 세숫대야나 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들통이 하나씩은 있었을 것이다.
우리 회사 골프코스에는 밤나무가 많았다.
가을이면 고객들이 떨어진 밤을 주워 먹고 손을 내 타월에 닦거나 하면, 차마 뭐라 말은 못 했지만 그게 정말 싫었다.
그 타월은 그날로 쓸모를 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밤 물은 아무리 삶아도 빠지지 않는 아주 강력한 염료였기에...
요즈음은 각 전동카트에 물티슈와 화장지가 항상 비치되어 있어 그럴 염려는 덜었다.
일명 찔레꽃 장갑...
손이 작은 나에게는 장갑의 손가락이 너무 길어 오히려 불편했던 예식용 하얀 장갑, 장갑의 손등에 하얀 찔레꽃 문양으로 수가 놓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손이 열일 해야 하는 나는 매번 새 장갑을 사면 장갑의 손가락 끝을 잘라 내 손가락 크기에 맞춰 다시 바느질을 해서 사용해야만 했다. 지금은 사이즈도 다양하고 손바닥 부분에 논슬립 처리가 되어 있어 훨씬 클럽을 잡기가 수월해졌지만 역시 그때는 뭔가 조금씩 부족하고 아쉽던 시절이었다.
현재의 진행방식은 캐디 혼자서 4명의 고객들을 감당해야 하니 골프채를 적게는 4개 많게는 10개 이상을 한꺼번에 분리해서 들어야 한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고객별로 각자의 클럽을 끼어야 하고 볼도 닦아야 하니 손가락 관절도 굵어지고 손등의 시퍼런 혈관들도 마치 나무뿌리처럼 울룩불룩 솟아있다. 손의 과도한 사용으로 자주 붓고, 심할 때는 손가락이 구부려지지 않을 때도 있다. 골프엘보는 연중행사처럼 나를 괴롭힌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손을 안 쓰는 게 제일 좋다지만 생업이 달려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엄마는 이런 현실을 아시는지 내 일을 ‘뼈가 녹아내려 버는 돈’이라고 표현을 하며 안쓰러워하신다.
어디 내 일만 그러하겠는가! 세상의 밥벌이가 모두 그렇지.
그런 억척스럽고 미운(?) 손을 감쪽같이 가려주는 신부용 장갑의 비밀...
장갑 하나에도 캐디의 삶이 서려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캐디의 하얀 수건과 하얀 찔레꽃 장갑...
그건 고객을 향한 캐디의 순정이지 않았을까?
늘 정갈하게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는 순백의 순수한 마음.
맨 처음 누가 사용을 기획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 사람의 의도도 이게 아니었을까? 우리의 사수들은 말로 하지 않고 늘 행동으로 보여줬던 것이고 그게 우리의 전통이 되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성이나 어떤 규칙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아니다.
때론 조금 번거로워도 감성과 낭만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게 인간이니까 말이다.
고만고만한 담장들이 어깨를 나란히 걸고 서로의 온기를 지켜주던 그 시절 우리 동네 골목길.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빨래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