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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맛

by 모모루

올봄, 텃밭에 상추를 심었다. 적상추와 청상추는 종자를 사다가 심었고, 로메인 상추는 씨를 뿌렸다. 상추들은 모두 잘 자랐다. 특히 씨를 뿌린 로메인은 자라는 속도가 빨라 종자로 심은 다른 상추들을 금세 따라잡았다.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겨울 동안은 내내 비가 내리지만, 여름이 되면 바짝바짝 마른다.

햇볕은 타들어갈 듯 뜨겁다가도 구름이 해를 가리면 곧장 서늘해진다. 덕분에 끈적이지 않아 에어컨 없이도 쾌적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다. 다만, 이 기후는 자연에는 꽤 가혹하여, 계곡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자연 발화된 산불이 숲을 몽땅 집어삼키기도 한다. 길가의 잔디들도 누렇게 말라버린다.

그러나 텃밭에는 공용 수도가 있고, 물만 잘 주면 작물은 뜨거운 볕을 동력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어제 아침, 흠뻑 물을 줬건만, 흙은 그새 푸슬푸슬하게 말라 있다. 작았던 상춧잎은 밤사이 손바닥만큼이나 자라 있다. 거의 매일 한 바구니씩 상추를 딴다. 집에 상추가 넘쳐난다.




많은 양의 상추를 해치우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상추 겉절이를 만들어 비빔밥으로 먹는 것이다.

상추는 손으로 뚝뚝 뜯어 커다란 양푼에 담는다. 간장과 액젓, 다진 마늘과 설탕,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다. 새콤한 맛을 원하면 식초를 몇 방울 넣어도 좋다. 이렇게 만든 상추겉절이에 밥을 넣고 참기름을 한 바퀴 둘러 비벼 먹는다. 계란 프라이를 하나 부쳐 넣으면 더 맛있다. 커다란 양푼에 가득 차 있던 상추는 짭조름한 양념에 숨이 죽어 금방 한 줌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상추는 양껏, 아주 많이 넣어도 무방하다.

길고 빳빳한 로메인은 주로 샌드위치에 넣거나 샐러드로 먹지만, 나물로 무쳐도 꽤 괜찮다. 데쳐도 아삭한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고 맛과 향이 강하지 않아 어떤 양념에도 무난히 어울린다. 만드는 법은 다른 나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입크기로 자른 로메인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뒤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짠다. 소금과 참기름, 잘게 부순 참깨를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끝이다. 마늘은 넣지 않는 편이 나은데, 그러면 맛이 훨씬 깔끔하고 입에 냄새도 남지 않는다. 거의 배추만 한 로메인 한 포기도 나물로 만들면 사각 반찬통 하나에 들어갈 정도로 쪼그라든다. 이 역시 많은 양을 처리하기에 그만이다.




푸성귀만 몇날며칠 먹다 보면 나중에는 좀 질린다. 그래도 그만 먹을 수 없는 것이, 날씨는 갈수록 더워지고, 죽었다 깨어나도 불 앞에서 음식 하기는 싫고, 배는 고프니 뭐라도 먹어야 되고, 텃밭 상추들은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는 듯 무서운 기세로 잎을 틔운다. 부엌에는 상추가 자꾸만 쌓인다.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다. 먹기 싫어도 그냥 먹어야 한다.

오늘은 상추가 영 지겨워서 오이고추를 따 먹었다. 오이고추는 모종 하나만 심었을 뿐이고, 상추만큼 빨리 자라지 않아서 양이 넘쳐나지 않는다. 이제야 먹을 만큼 커져 한 움큼 따올 수 있었다.

오이고추도 비빔밥으로 먹는다. 듬성듬성 썬 오이고추는 쌈장에 무친다. 비법이 하나 있다면 쌈장에 볶은 콩가루를 넣는 것이다. 그러면 쌈장이 하나도 안 짜고 환상적으로 맛있어진다.

그걸 밥에 넣고, 캔참치 하나 얹어 쓱쓱 비빈다. 김가루를 넣거나 조미김에 싸 먹으면 궁합이 좋다. 이 조합은 예전에 인스타그램에서 본 것으로, 먹어보면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란다.

맨날 상추만 먹다 오이고추를 먹으니 나름 별미처럼 느껴졌다.




오늘도 날씨는 무더웠다. 태양은 모든 걸 태워버릴 듯 뜨겁게 내리쬔다.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텃밭에 물을 주고, 따온 푸성귀들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단단하면서도 연한 과피가 입안에서 으스러지면서 잔뜩 머금고 있던 물기가 터져 나온다. 청량하고 풋풋한 풀내가 입 안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

젖은 흙냄새

초록빛의 향연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

호스로 물을 뿌릴 때 볕 사이로 희미하게 떠오르던 작은 무지개.

여름을 이루는 조각들이 몽땅 섞여서 입 안으로 들어온다.

여름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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