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초입부터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닭강정을 파는 가게 앞이다. 입구에서 기웃거리니 직원이 가게에서 먹고 갈 건지, 포장을 해 갈 건지 묻는다. 먹고 가면 줄을 설 필요가 없지만, 포장하려면 줄을 서야 한단다. 보통은 식당에서 먹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반대다. 그럴 법도 한 게 닭강정은 갓 만든 것보다 식은 뒤가 더 맛있다. 심지어 냉장고에 넣었다 며칠 뒤 꺼내 먹어도 맛이 좋다. 이따가 돌아갈 때 사기로 하고, 우선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시장은 적당히 번잡하고 활기가 넘친다.
흥정하는 소리, 시끄럽지만 친근한 말투, 좌판 위 쌓인 색색의 과일과 채소들, 흙냄새, 기름 냄새, 음식 냄새, 바닥에 물을 뿌린 뒤의 습기.
그런 것들이 뒤섞인 분위기에는 갓 지은 밥이나 구수한 국물 같은 따스함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쓸데없는 번뇌와 고민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예컨대 삶의 의미를 묻거나, 지나간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되짚는 따위의.
공허한 질문이 물러난 자리에는 단지, 살아있다, 살고 있다, 살아내고 있다―라는 단순하고 또렷한 생의 체감만이 남는다.
시장이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살면 어떨까? 매일 그날의 찬거리를 사고 하루치 맑은 실존감을 얻는다면?
제법 근사한 생활이 될 듯싶다.
시장 골목 중간쯤에서도 긴 줄을 맞닥뜨렸다. 여기는 또 뭣을 파나 들여다본다. 즉석에서 구운 김이다.
가게는 마치 작은 공장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직원 네 명의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좌판의 양쪽 끝에 선 두 사람은 숯불 화로를 앞에 두고 그 위에다 김을 굽는다. 구워진 김은 옆에 놓인 사각 통에 차곡차곡 쌓인다. 통이 어느 정도 차면 다른 직원이 수거해서 포장 자리로 옮긴다.
틈틈이 대기 중인 손님들의 줄도 관리한다. 좀 더 가장자리로 붙으라거나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를 내린다. 줄을 선 손님들은 안내에 따라 가게의 직원들만큼이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포장 담당 직원은 김을 열 장씩 포개어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는다. 납작한 플라스틱 자로 비닐 위 몇 번 선을 그으면 김이 먹기 좋은 크기로 반듯하게 잘린다. 봉투 입구는 끝까지 닫지 않고 숨구멍을 남긴다. 손바닥으로 봉투를 꾹 눌러 공기를 뺀 뒤 마지막에야 완전히 봉해진다.
단순한 공정의 반복인데도,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다.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은 한 봉지에 열 장씩 담아 삼천 원에 파는 김을 열 봉지, 스무 봉지씩 사간다. 이곳을 예전에 와 본 적이 있는 S도 이 집 김이 신선하고 맛있다고 한마디 거든다.
얼떨결에 열 봉지를 샀다. 사실 맛보기용으로 한 봉지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고작 그것만 사기에는 기다린 시간이 아깝다. 두 봉지는 S를 주고 나머지는 맨밥에 김 싸 먹는 걸 좋아하는 어린 조카들 갖다 주기로 했다.
골목 끝에 이르자 또 하나의 줄이 보인다.
이번엔 만두집이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려는 건 정작 만두가 아니다. 화덕에서 구워낸,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공갈빵이다. 40년 정통 중국식이라고 커다랗게 적힌 간판의 문구는 어쩐지 신뢰가 간다. 이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쓰는 연변 사투리 때문이다. 공갈빵을 좋아하는 여동생에게 사다 주고 싶은데, 또다시 줄을 설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만둣집 근방의 다른 상점에서도 공갈빵을 팔고 있었다. 그중 한 곳에서 작은 공갈빵을 세 개씩 한 묶음으로 파는 것을 샀다. 나는 이걸 꽤 조심히 들고 서울까지 갔지만, 가는 동안 부서지고 말았다. 크기만 크고 속은 텅 비어 있는 터라 부서지고 나니 영 볼품없었다. 그래도 동생은 좋아라 한다. 그 모습을 보니 좀 번거롭더라도 원조집의 공갈빵을 사다 줄 걸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또 뭐를 샀더라? 어느 청과물 가게에서 찹쌀로 만든 가마솥 누룽지를 샀다. 공장에서 만든 얇고 딱딱한 누룽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바닥은 옅은 갈색으로 적당히 눌리고 위쪽은 하얀 밥알이 그대로 살아있는 두툼한 누룽지다. 이건 캐나다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1킬로짜리 한 봉지가 만원이다. 욕심 같아서는 두 세 봉지 싸들고 가고 싶지만, 짐가방이 너무 무거워지면 안 되므로 꾹 참고 한 봉지만 샀다.
시장을 다 둘러본 뒤에는 다시 닭강정 가게로 돌아갔다. 줄은 길었지만, 생각보다 순서는 금방 돌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눈치챈 건, 닭강정을 산 사람들 대부분이 건너편 가게도 들른다는 것이다. 그 가게는 치킨집 간판을 걸고 있었지만 오징어 튀김을 팔고 있었다. 아마도 앞 가게의 위세에 밀려 주력 메뉴를 바꾼 듯하다. 이 전략은 꽤 적중한 모양이다. 사람들은 마치 정해진 코스처럼 앞가게에서는 닭강정을, 건너편 가게에서는 오징어 튀김을 사간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닭강정을 산 뒤 건너편 가게로 가 오징어 튀김을 주문했다. 가격이 만칠천 원이나 해서 꽤나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종이 상자 가득 담겨 나온 튀김을 보니 납득이 된다. 김이 폴폴 나는 오징어 튀김에서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마치 놀이처럼 즐겁다.
닭강정을 제외하곤 이곳에서 뭐가 인기 있고 맛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어 보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와 사람들의 반응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하는 노력이란 약간의 관찰력을 발휘하는 정도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이 이곳에서는 전혀 힘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다수를 따르는 건 무지성적 태도라거나,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당위 같은 것들이다.
주체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내가 그다지 거슬리지도,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다. 남들 사는 데로 따라 사니 고민할 필요도 없고 어찌나 편한지. 무엇보다 그렇게 산 것 중에 실패가 하나도 없다. 이건, 그저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 같다.
유연함을 가지라는 조언은 아마도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나는 조금 더 유연해지기로 했다.
사람들 따라 음식 몇 개 사면서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건 너무 오버일지도― 그런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