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S는 작년에 송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인천 쪽은 공항만 왔다 갔다 해봤지 다른 지역은 가본 적이 없었다. 송도도 뉴 타운이라는 것만 들어서 알고 있었을 뿐이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오르자 건너편 너머로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초고층 빌딩들이 유리벽을 번뜩이며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도심에 들어서자 도로는 넓고 매끈하게 뻗어 있었고, 구획은 반듯했다. 모든 게 새것처럼 반들거렸다. SF영화 속에 구현된 미래도시같았다.
S가 이사한 집은 즐비해 있는 초고층 아파트 중 하나였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는 22층까지 단숨에 올라갔지만,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순간적으로 귀를 콱 막히게 만들었다.
집에 들어서니 이번에 중학생이 된 S의 딸내미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 아이를 S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봐왔는데, 지금은 제 엄마 키를 훌쩍 따라잡은 십 대가 되어 있었다.
신축 아파트는 도시의 전경만큼이나 말끔했다. 실내는 넓고 밝았다. 거실 한쪽 벽은 커다란 통창으로 되어 있어 개방된 느낌이었다.
S는 통화 중에, 새 집에서는 거실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인다고 했다. 해가 질 무렵에 수면이 반짝이는 게 예쁘다고도 했었다. 그 말대로 통창 밖은 시야가 탁 트였고 멀리 바다가 보였다. 늦은 오후의 기울어진 햇볕이 거실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고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창 너머 보이는 바다와 유리창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오는 빛은 꽤 마음에 들었다.
S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나는 괜스레 딸내미 방에 들어가 말을 건네보았다. 딸내미는 경직된 표정으로 내가 하는 질문에 단답형으로만 답했다. 불청객이 방에 들어온 것도 마땅찮은데 이것저것 캐물으니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게 놀아달라고 조르기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나 간신히 답하는 과묵한 사춘기 소녀가 되어 있었다. 격세지감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딱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잠시 후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는데, 집에 오기 전 들른 시장에서 사 온 닭강정과 오징어튀김으로 한 상 차려놓고, 중학생 딸내미에게는 난데없이 마트에서 파는 즉석 마라탕을 데워준다.
"도대체 왜? 이 맛있는 음식을 다 놔두고?"
의아해하자 S가 말하길, 요즘 아이들은 마라탕이 최고란다. 본인이 마라탕 먹겠다 해서 분부대로 올린 거란다.
실제로 딸내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닭강정을 집어먹을 때는 영 시들한 표정이었으나, 붉은 기름이 둥둥 떠있는 국물 속 국수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후루룩 후루룩 맛나게 먹었다.
S가 내 몫으로는 비빔국수를 한 그릇 뚝딱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손수 국수를 삶고, 송송 썬 김장김치를 고명으로 얹어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왔다. 한 입 먹는데, 친구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웬만한 맛집에서 파는 국수보다 더 맛있었다. 국수도 딱 적당히 삶아졌고, 양념장은 새콤달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진동했다.
엠티 가서도 남이 끓여준 라면이나 받아먹던 S가 이제는 손맛 좋은 베테랑 주부가 되었다. 또 한 번, 격세지감을 느꼈다.
마라탕만 먹는다고 아이에게 한소리 했건만, 정작 나도 다른 음식은 뒤로한 채, 국수 그릇에만 거푸 손이 갔다.
내가 폭풍 칭찬을 하며 맛의 비법이 뭐냐고 묻자, S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곤 조심스레 마트에서 파는 초고추장병을 보여준다.
"아니야. 아무리 시판 초고추장을 썼더라도 이 비빔국수는 뭔가 달라! 분명 다른 비법이 있는 거라고."
내가 채근하듯 묻자 S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우리 엄마 김치라서 그래."
S는 골치 아픈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은 마냥 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래 비빔국수는 김치가 맛있으면 장땡이야."
S는 큼지막한 닭강정 조각을 입에 밀어 넣으며 덧붙였다.
나는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김치가 맛있으면 장땡이라는 말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친정엄마가 담가 준 김치라면 더 할 말이 없다.
S가 손맛 좋은 베테랑 주부가 되었다는 방금의 판정을 수정해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이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