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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May 30. 2023

천금매소(千金買笑)

천금(千金)을 주고서라도 웃음을 살 수 있다면…….

  천금매소(千金買笑)는 ‘천금을 주고 웃음을 산다’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는 ‘어리석은 행동을 이르는 말’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한자 사전에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함을 비유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오매불망(寤寐不忘) 원하는 바가 있으면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일 텐데 이것이 왜 어리석은 행동인지는 이 말이 유래된 고사(故事)를 알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열국지(列國志)』에 전합니다.     


  주(周)나라 12대 유왕(幽王)은 포사(褒姒)라는 여인에게 빠져 왕후(王后) 신씨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한 다음 포사를 왕후로, 그녀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웁니다. 그런데 포사는 좀체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왕은 ‘누구라도 포사를 웃게 하는 사람에게 천금의 상을 내린다’고 선포합니다. 이에 괵석보(虢石父)라는 사람이 ‘거짓 봉화를 올렸다가 제후들이 허탕 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웃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주(周)나라 천자(天子)는 제후들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제후들은 천자에게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집니다. 이것이 봉건제도(封建制度)의 전형입니다. 외적이 나타나면 병력을 이끌고 주나라를 지키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제후의 의무이죠. 유왕은 적이 침입하지도 않았는데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거짓 봉화를 올리게 합니다.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옵니다. 제후들이 허탕 치고 돌아갑니다. 이 모습을 본 포사는 깔깔 웃습니다. 괵석보에게는 천금의 상이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천금을 주고 웃음을 산다’는 뜻의 ‘천금매소(千金買笑)’가 유래되었습니다.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유왕은 수시로 거짓 봉화를 올립니다. 몇 차례 허탕 친 제후들은 ‘쓸데없는 고생으로 한 여자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다’며 봉화가 올라도 가지 않기로 합니다. 

  적(견융족)이 진짜로 쳐들어왔습니다. 봉화는 올랐지만 제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왕과 태자 백복은 견융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쫓겨났던 원래 태자 의구(宜臼)가 주나라 13대 평왕(平王)이 됩니다. 평왕은 견융족의 침입이 두려워 호경(鎬京)에서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도읍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졌습니다. 서주(西周) 시대가 끝나고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주(周) 천자(天子)의 힘을 능가하는 제후들이 속속 등장해 그들끼리의 땅 따먹기 다툼이 본격화되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고사를 중심에 놓고 보면 천금매소(千金買笑)는 천자(天子)라 일컬어진 왕이 지극히 개인적 감정을 충족하기 위해 천금을 낭비했으니 국가 재정의 측면이나 백성의 신뢰 측면에서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왕’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리려 나라를 망하게 한 최악의 리더로 불리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웃음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천금매소(千金買笑)의 의미는 달라질 여지가 있습니다. 만약 유왕이 백성들의 웃음을 위해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면 최상의 리더로 불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문자 생활을 할 수 없는 백성들의 답답함의 눈물을 닦아주고 백성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글을 아는 자들의 엄청난 반대와 전대미문의 문자 창제라는 창조의 고통을 이겨내고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천금과 바꾸겠습니까 만금과 바꾸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오랫동안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 얻기 위한 고행에 비하면 천금은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여기 깨달음이라는 미소를 위해 천금을 아끼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있습니다. 웃음의 주체가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경우입니다.  

   

        산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화자는 한여름에 가야산에서 노스님의 독경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겨울에 다시 가야산 해인사를 찾았습니다. 화자는 상서로운 눈 사이로 핀 매화 봉오리를 봅니다. 매화 봉오리와 함께 노스님의 눈매에 미소가 번지는 모습도 봅니다. 한여름부터 한겨울까지 노스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혹독한 정진 과정이 있었음이 ‘독경 소리’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혹독한 과정을 통해 이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혹한을 이겨내고 매화가 꽃봉오리를 피웠듯이 혹독한 수행 과정을 거쳐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미소’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노승(老僧)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천금은 물론 혹독한 고행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승으로부터 천금매소가 유래되었다면 ‘웃음을 얻기 위해 천금을 아끼지 않는 일’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지요.

     

  웃음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천금매소를 실천하는 사람은 최악의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최상의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을 충족하기 위해 천금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내면의 발전을 위해 천금을 기꺼이 지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천금매소는 어리석음과 낭비의 대명사가 아니라, 귀감(龜鑑)으로 삼을 만한 가치 있는 일의 대명사로 국어사전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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