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2)
10월 14일 토 맑음
비가 오는 날, 서울역으로 가서 KTX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날이 갰다.
10년 만에 타는 기차. 그때도 부산을 다녀올 때였다. 말로만 들었던 KTX 총알 열차 한 번 타보자고 했던 것이다. 이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겨우 두 시간 반 거리다.
하필 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장기 입원 치료하는 바람에 만나기 어려웠던 절친인 영종이 강남역 부근에 있는 나의 숙소까지 차를 몰고 왔으며, 기꺼이 나를 서울역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혼자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일부러 나를 찾아왔으며, 서울역에서도 내가 기차를 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기차는 2시 반에 출발하므로 우리는 서울역사 안에서 함께 브런치를 먹고 잠시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부산에 머무르는 동안 시간을 내어 찾아오겠다는 약속도 해주었다. 영종은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이며, 진정으로 믿을 만한 친구이다. 나는 기꺼이 그가 부산으로 와서 가능한 한 여러 날을 나와 함께 지낼 것을 바란다.
드디어 낯선 숙소에 들어와서 일기를 쓰는 이 밤…
오후 다섯 시 무렵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시월 중순 오후의 맑은 하늘과 공기가 나를 반기는 듯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은 경쾌해 보였고 어디선가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도 들렸다. 약간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아무 어려움 없이 지하철역으로 갔다. 서울 지하철과 다를 바 없는 부산 지하철이지만, 다만 부산 사람들은 뭔가 모르게 서울 사람들과 달라 보였다. 어딘가 좀 더 한가로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면역으로 왔으며 마치 첫 길이 아니라는 듯이 쉽게 숙소를 찾아갔다. 이미 전화를 통해 받은 숙소 주소와 비밀번호를 가지고 6층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평범한 신축 원룸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에는 화장실이, 오른쪽에는 신발장과 이어서 미니 부엌이 있다. 부엌에는 빨래기계가 있지만 건조기가 없다. (결국 나는 빨래를 할 때마다 건조대에 널어서 말려야 했다.)
미니 부엌 옆에는 지나치게 큰 새 냉장고가 있고 수납장도 넉넉하게 많다. 입구 반대편 통창 앞에는 둥근 책상과 의자, 그 앞에는 풀사이즈 침대가 있으며 그 맞은편 벽에는 65인치로 보이는 텔레비전이 걸려 있다. 화장실은 깨끗한 현대식 시설이지만 욕조는 없다.
숙소는 크지 않지만 나 혼자 지내기에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굳이 불만족스러운 것을 말하자면 책상이다. 작은 둥근 책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글을 써야 하는데 이런 책상은 불편하다. 노트북 컴퓨터를 올려놓고 사용하거나 책을 읽기에는 네모난 큰 책상이 더 좋다.
원룸을 환하게 해주는 커다란 통창 중간에 있는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방충망이 잘 고정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모두 괜찮다. 여러 사정으로 복잡했던 서울에서 벗어나 무사히 부산으로 내려온 것은 매우 다행이다. 나는 비로소 더욱 큰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늘은 정말 놀라운 날이다.
낮에 서울역에서 너와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서울에서 40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부산 남포동에서 혼자서 저녁을 먹는구나.
한 달 전에는 뉴욕에서 서울로 '순간 이동'을 했던 듯한데 오늘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좋다
숙소로 들어와서 잠시 쉰 후 6시에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오늘 ‘영도 축제’ (영도는 소설 '파친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섬)가 있다고 해서 영도대교로 갔다. 그곳은 10년 전에도 봤던 다리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축제는 버스를 타고 영도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다. 그 바람에 영도대교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자갈치 시장을 둘러보고 국제시장과 광복동 패션 거리와 BIFF 광장과 남포동 족발골목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토요일 밤 남포동 거리에는 주말 분위기에 휩싸인 수많은 인파가 붐비고 있었다. 주말 저녁 서울의 광장시장을 연상시킬 만큼 음식과 사람들로 꽉 찼다. 전혀 예상치 않았다가 만나게 된,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다. 차가 다니지 않는 거리에 수많은 먹거리가 있어서 나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게 된다. 얼굴에 웃음 가득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들떠서 낯선 흥분을 느꼈다.
부산의 첫 밤.
이제야말로 낯선 곳에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한 달 살기를 시작한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곳에서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새로운 설렘과 기대를 함께 갖는다.
숙소 여건 탓인지, 몸 상태 때문인지, 어딘가 힘들고 서글펐던 서울을 떠나니 다소 홀가분하다.
지난 한 달간 서울에서는 몸도 아프고 심리적으로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부산에서 은근히 새로운 기대를 품고 있다.
부산 중심지인 서면에 잡은 이 숙소는 작기는 하지만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 수준으로 깨끗하고 모든 게 구비되어 있다. 서면역 12번 출구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다. 차도만 건너면 부산 최대 전통시장인 부전시장이 있다.
이 밤에 칼 젠킨스의 음악, "THE ARMED MAN: A Mass for Peace" Benedictus를 보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살육과 공포로 힘겨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