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2)
10월 14일 토 맑음
비가 오는 날, 서울역으로 가서 KTX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날이 갰다.
기차를 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10년 만이다. 그때도 부산을 다녀올 때였다. 말로만 들었던 KTX 총알 열차 한 번 타보자고 했던 것이다. 이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겨우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한다.
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였다. 요즘은 미국에서 치료를 받으러 서울에 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미국에서 탈장 증세가 있었고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와야 했다. 미국에서 수술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 의료보험을 이용한다면 서울에서 현금을 주고 치료를 받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고 절차도 복잡하다. 미국에 비해, 한국의 병원들은 가격이 저렴하고 실력은 우수해 보이며 매우 신속하고 직원들이 친절하다. 한국처럼 훌륭한 전국민 의료보험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우수한 의료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거의 없다.
서울로 여행을 와서 탈장 수술을 받고 나서 몸이 괜찮아진 듯해서 나는 마침내 부산으로 가기로 했다. 내 계획을 들은 절친인 영종이 서울역에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하필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이었다. 그는 강남역 부근에 있는 나의 숙소까지 차를 몰고 왔다. 내가 혼자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일부러 나를 찾아왔으며, 서울역에서도 내가 기차를 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기차는 오후 2시 반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서울역사 안에서 함께 브런치를 먹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부산에 머무르는 동안 놀러오라고 말했고, 그는 몸이 낫는 대로 시간을 내어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는 수년째 간암을 앓고 있으며 여러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다. 하필 내가 서울에 올 때도 그는 마침 병원에 입원해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자주 볼 수 없었다.
영종은 항암치료를 해도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여행을 좋아해서 많은 곳을 다녔고 진정으로 믿을 만한 친구이다. 나는 기꺼이 그가 부산으로 와서 가능한 한 여러 날을 나와 함께 지낼 것을 바란다.
KTX를 타는 것은 두 번째다.
10년 전에 하루 만에 혼자서 부산을 다녀올 때도 이 열차를 탔었다. 그날은 부산역에 도착해서 자갈치시장과 용두산공원, 해운대 등 구도심을 돌아다녔다. 매우 낯선 상황에서 혼자 다니느라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었다. 겨우 하룻동안 그렇게 부산을 돌아다니고 난 후에 나는 그날 밤에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하룻밤 자면서 구경해야 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정말 다르다.
나는 부산에 관해 자세히 알고자 한다.
부산은 어쩌면 내가 은퇴한 후에 살 곳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부산이 은퇴 후 살 만한 곳으로 꽤 훌륭한 후보 지역이다. 바닷가에 이렇게 크고 현대적인 도시가 있어서 날씨도 좋고 해수욕장도 여러 곳이다.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 시스템이 훌륭하게 갖춰져 있고 다양한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한 달 동안 부산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닐 계획이다.
드디어 낯선 숙소에 들어와서 일기를 쓰는 이 밤…
오후 다섯 시 무렵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시월 중순 오후의 맑은 하늘과 공기가 나를 반기는 듯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은 경쾌해 보였고 부산역 근처 어디에선가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도 들렸다. 약간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아무 어려움 없이 부산역 앞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서울 지하철과 다를 바 없는 부산 지하철이지만, 부산 사람들은 뭔가 모르게 서울 사람들과 달라 보였다. 주말 오후라서 그런지, 어딘가 좀 더 한가로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면역으로 왔으며 마치 첫 길이 아니라는 듯이 쉽게 숙소를 찾아갔다. 이미 전화 메시지를 통해 숙소의 주소와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내 방은 6층에 있는 평범한 신축 원룸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에는 화장실이, 오른쪽에는 신발장과 미니 부엌이 있다. 부엌 싱크대 밑에는 빨래기계가 있지만 건조기가 없다. 따라서 나는 빨래를 할 때마다 접이식 건조대에 널어서 말려야 했다.
미니 부엌 옆에는 방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큰 새 냉장고가 있다. 나는 한 달 동안 그 냉장고를 거의 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또 방의 크기에 비해 수납장이 넉넉한데, 나는 겨우 작은 가방 두 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걸어둘 옷이 많지 않았다.
입구 반대편, 벽 전체를 투명한 유리를 가진 통창이 차지하고 있다. 그 앞에는 둥근 책상과 의자, 그 앞에는 풀사이즈 침대가 있으며 그 맞은편 벽에는 65인치로 보이는 텔레비전이 걸려 있다. 화장실은 깨끗한 현대식 시설이지만 욕조는 없다.
숙소는 크지 않지만 나 혼자 지내기에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굳이 불만족스러운 것을 말하자면 책상이다. 작은 둥근 책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책상을 글을 오래 쓰는 작업을 하기에는 불편하다. 노트북 컴퓨터를 올려놓고 사용하거나 책을 읽기에는 네모난 큰 책상이 더 좋다.
원룸을 환하게 해주는 커다란 통창 중간에 있는 작은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방충망이 잘 고정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모두 괜찮다. 여러 사정으로 복잡했던 서울에서 벗어나 무사히 부산으로 내려온 것은 매우 다행이다. 나는 비로소 더욱 큰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늘은 정말 놀라운 날이다.
낮에 서울역에서 너와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서울에서 40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부산 남포동에서 혼자서 저녁을 먹었다.
한 달 전에는 뉴욕에서 서울로 '순간 이동'을 했던 듯한데 오늘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좋다
숙소로 들어와서 잠시 쉰 후 6시에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오늘 ‘영도 축제’가 있다고 해서 영도대교로 갔다. 영도는 소설 '파친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섬이다. 그곳에 저 유명한 영도다리가 있다. 10년 전에도 봤던 다리다. 나에게는, 한국전쟁 시절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을 때 헤어진 식구들이 다시 만나자던 약속을 했던 노랫가사 때문에 왠지 영도다리가 익숙하게 들렸다. 사실은 오늘날 거대한 현대식 교량에 비하면 아주 작은 다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축제는 버스를 타고 영도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다. 지하철로 가는 곳도 아니고 밤 늦게 잘 모르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바람에 나는 영도대교부터 걷기 시작해서 자갈치 시장으로 갔다. 십 년 전에 왔을 때는 사람이 무척 많았는데 팬데믹 지난 후에는 아주 한산해졌다. 썰렁한 자갈치시장을 둘러보고 나서 나는 국제시장과 광복동 패션 거리와 BIFF 광장과 남포동 족발골목까지 돌아보았다.
토요일 밤 남포동 거리에는 주말 분위기에 휩싸인 수많은 인파가 붐비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곳이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인 줄 미처 몰랐었다. 주말 저녁 서울의 광장시장을 연상시킬 만큼 음식과 사람들로 꽉 찼다. 전혀 예상치 않았다가 만나게 된,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다. 차가 다니지 않는 거리에 수많은 먹거리가 있어서 나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까지 덩달아 들떠서 낯선 흥분을 느꼈다.
부산의 첫 밤.
이제야말로 낯선 곳에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한 달 살기를 시작한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곳에서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새로운 설렘과 기대를 함께 갖는다.
숙소 여건 탓인지, 몸 상태 때문인지, 어딘가 힘들고 서글펐던 서울을 떠나니 다소 홀가분하다.
지난 한 달간 서울에서는 몸도 아프고 심리적으로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부산에서 은근히 새로운 기대를 품고 있다.
부산 중심지인 서면에 잡은 이 숙소는 작기는 하지만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 수준으로 깨끗하고 모든 게 구비되어 있다. 서면역 12번 출구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다. 차도만 건너면 부산 최대 전통시장인 부전시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