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켜둔 촛불이 가물가물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눈길에 버려진 타다 만 연탄재처럼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쌓인 막장의 갱목처럼
추적추적 겨울비에 떨며 내가 버려져 있어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
정호승 - 물끄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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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의 '물끄러미'를 그려봅니다.
겨울비가 추적 거립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세월을 이겨 낸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난 계절을 몸에 가득 물들이곤
하나 둘 처음 온 그곳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갑니다
그 흘러가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는
아무런 욕심도 어떤 원망도 담기지 않고
그저 사랑이
그저 그리움이
그저 애틋함이 스며 있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시선 끝에
당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물끄러미 내다보는 시선 끝에
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서로
물끄러미 마주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시선에 평화가 가득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