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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Aug 08. 2019

보듬어야 할 상처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새록새록 돋아나는 상처를 위한 협주곡

상처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크기와 자신의 마음가짐에 비례해서 들쑥날쑥 나타나는 것 같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만나면 그 상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는 크기가 되고,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그 상처는 내게는 없던 일처럼 쿨하게 뒤돌아서는 이별과도 같은 일이 되고,

그러다 그러다 문뜩 생각나면 시선을 먼 곳에 머물기만 해도 가득 담긴 눈물을 쏟아내게 되고,


그것이 일상이 되다 만나는 지점은 지금이다.


지금에서 바라보는 나의 상처의 크기는 어느 정도 일까? 꾹꾹 눌러두는데도 자꾸 돋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처에 항생제를 바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 상처는 연고로 치유되지 않을 만큼의 커다란 덩어리로 자리하고 있다.

예전보다 의학이 발달하고 살기 좋아졌는데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왜 늘어나는 걸까?


미국의 시인 윌리스 스티븐스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통렬한 말을 남겼다.

"아들의 삶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처벌이다."

내 아이가 생각이 났고, 딸만 둘 인 내 동생이 생각이 났다.


이런 글을 만나면 무너져 내린다.

사람의 삶은 이처럼 연결고리가 되는 삶 밖에 살 수 없는 걸까?

내가 잘 살려고 마음먹고 성실히 살아간다 해도 내 아버지의 삶까지 내가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내 몸의 유전자에 아버지의 아버지의 삶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면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는 어느 정도 일까?


모델링이 없는 내 아이의 삶은 어떻게 그려져야 할까?

엄마하고만 이야기를 해서 목소리 톤이 여자의 음역대와 같은 내 아이.

사춘기 아들에게 어떻게 모델링을 해줘야 하는지 몰라서 책에서 답을 찾는 엄마.


내 아이는 엄마의 고뇌와 노력과 눈물을 모두 담은 삶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할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나의 내면까지 아이에게 줘야 한다면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포기했어야 한다.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은 엄마, 아빠의 자격이 없는 걸까?


이제라도 잘 살아보려고 감쳐두었던 상처를 꺼내서 하나하나 치료해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보듬어야 할 상처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아직은 상처의 깊이를 가름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상처에 내 상처를 더한 듯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내 상처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다.

나뿐일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담아보면 지구보다 더 많은 덩어리가 될 듯하다.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어른 아이가 되어서 살아가는 나. 그리고 우리.

내 마음속 어린이를 만나고 아파하고 쏟아내고 일어난다.

내 삶은 그런 과정에서 단단해지고 담을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담을 쌓는다.


어른 아이가 되어 만난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이 무너뜨린 그 담을 보수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상처에 상처가 더해져서 토네이도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그 상처를 난 언제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지금도 새록새록 돋아나는 상처라는 이름의 아픔을 튕겨내고 있지만 곧 무너질 듯하다.

무너지기 전에 상처를 꺼내 마주하며 토닥여주는 나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라도 내 상처로 인해 타인에 삶에 상처를 더해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아파봤으니까......


상처를 토해내는 글을 만나는 것은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아프다.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보다 아프면 아프다 소리치는 이라이자가 되고자 한다.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내면에 쌓아두면 그 상처가 대물림된다니 우리 지금부터 소리쳐보자.


아프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보듬어야 할 상처를 만나고 싶다.

빗소리와 함께 새록새록 돋아나는 상처와의 협주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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