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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Aug 13. 2019

잘잘못에 대한 가족의 정의

자가 치유만 인정되는 가족의 상처

옳고 그름은 늘 자기 기준에서 정한다. 나는 늘 옳았다. 

나를 두고 떠난 엄마가 보고 싶었고 그 원인 제공을 한 아빠가 미웠다. 아빠의 고통이 무언지 내가 돌아 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지금이 살기 힘들었고 지금 내게 주어진 미약한 환경이지만 잘 견뎌 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를 떠나 동생 도시락을 싸고 내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야 했고, 학교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들과 잘 지내야 했다. 나의 아픔이 보일까 애써 크게 웃었고 성적이 떨어지면 원인을 찾을 선생님이 몰라야 했기에 평범한 일상을 보내왔다. 그때도.


     

나의 청소년기는 암흑이었다. 술로 계속되는 폭력. 그걸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간 엄마. 언니처럼 아빠가 나를 때렸더라면 이 집에서 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아빠는 나를 때리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난 언니처럼 큰 소리로 맞설 용기가 없었다. 나는 작았고 용기가 없었으며 늘 뒤에 물러나 지켜보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광경 앞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그런 작은 아이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청소년기 특유의 성장 과정을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정 환경 속에서 내게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엄마에게 늘 특별하게 자리 잡았던 동생.

아니, 아들.


그 아들은 엄마에게 몇 가지 의미를 합친 하나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랬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합숙소에서 안절부절 선배들의 매를 버티며 끝까지 집에 전화를 걸던 아이였고, 합숙소를 뛰쳐나와서라도 집에 와서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겁쟁이였지만 책임을 몸에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마음에 '가족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자리 잡은 건 당연한 걸까? 그 아이 기준에서도 그 아이는 늘 옳겠지. 나보다 더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을 테고 작은 누나가 싸주는 도시락을 그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고만고만한 남매 둘이는 서로 의지하며 술 심부름하고 남은 돈에서 과자와 엿을 사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밤마다 찾아와 아이들을 힘들게 하던 아빠. 그 아빠를 죽이겠다고 칼을 품고 다니던 그 아이. 그 아이를 말리던 작은누나. 그때는 당연히 그래야 했듯 누나는 또 자기 자리에서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다. 동생의 가슴에서 칼을 빼내었고, 우리가 죄를 지으면 “네 인생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철학적인 말과 "너와 나 둘 뿐인데 네가 그런 죄를 지으면 누나는 어떻게 아빠의 폭력을 견디겠냐"는 마음 맨 밑 감정을 자극할 줄도 아는 그런 나였다. 우리라도 그렇게 살지 말자. 아빠를 닮지 말고 안 되는 건 안 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자며 돈 많이 벌면 누나가 만 원어치 고기를 사주고 동생은 누나가 좋아하는 만 원어치 엿을 사준다고 둘만의 약속을 하고 폭풍 속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 아빠의 술주정을 작은 두 아이가 다 받아내었다.

만 원은 손에 쥐어지지않을 세상의 크기였고, 고기와 엿이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왜 엿을 좋아했을까? 달콤하고 이에 쩍 쩍 붙어 금니의 근원을 만들어 낼 그 단것의 원초적인 성분을 모를 나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받고 싶은 사랑을 달콤함에 대신한 것이었을까? 나는 유난히 엿을 좋아했다.


술 심부름하고 남은 돈으로 사서 먹는 엿은 정말 엿같았다.

그래도 난 열심히 먹었다.

내가 이 세상에 외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엿이, 하지 말아야 할 부도덕적인 의미를 담은 엿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몸을 상하게 할 걸 알았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의지할 게 없었던 것 같다. 다른 것을 사기에 술 심부름하고 남은 돈이 크지 않았으리라. 동생은 엿 가격보다 더 큰 값의 것을 골랐을 테니 100원 이하의 가격으로 큰 만족을 줄 것은 엿이었으리라. 덕분에 나는 지금 금니를 달고 있다. 처절하게 남은 그때의 기억이 내 이에 남아 있다.


나는 늘 옳았다. 동생을 달래는 것도 아빠의 술주정을 받는 것도 내 몫이었기에 잘 해내었다. 나의 성실함은 그때 고지를 달렸던 것 같다. 적당히 하는 성격이 못되는 나는 지금도 무척 성실하다. 지금도 나는 늘 옳아야 하기에 누군가가 내 생각에 준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나보다 더 잘났다거나 하면 기분부터 상하고 얼굴에 고스란히 표현한다. 난 옳았지만 하수다. 얼굴에 표시를 내니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감정표현을 받아 낼 사람이 없다. 모두와 친하지만 모두와 마음을 통하지 않고 나만 일방통행을 하듯 열심히 다가가지만 늘 다른 방향에서 함께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고 그냥 사람이면 다 좋았다. 다 맞춰주었고 다 잘해주다 어느 한 기점이 되면 나는 그 사람이 싫어진다. 내가 그만큼 정성을 쏟았는데 나를 무시하거나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뒤돌아서서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버린다. 내 마음도 함께 돌아선다. 무섭다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나를 방어하지 않으면 나는 더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나를 표현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감정대로 살아가야 함을 알기에 “이제는 끝이다" 라고 내뱉고 돌아서면 마음이 편하다.

나는 없다. 너만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철저히 나는 네가 되어 좋아하는 것도 너를 닮아갔다.

그러다 지쳐간다.

나를 찾아야 한다는 내면의 아이가 살아나면 그때 너는 나와 함께 하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나를 보호하며 나를 지켜가며 살았다. 정도를 벗어나서 도덕적이던 나를 파괴하던 때가 있었다. 사춘기를 겪지 못했던 나는 29살이 되어서야 사춘기를 겪었다. 그래서는 안됐는데 나는 간절했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가족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나를 생각해주는 보호해준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가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함께하지 못하지만 전화를 기다렸고 글을 기다렸다. 나의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이 알았고 내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증거를 수집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완전범죄를 저지르지 못했다. 죽어가던 나의 도덕성의 양만큼 나는 말라갔고 먹는 약은 늘어났다. 하지만 아무도 나와 함께 가지 않았다. 내가 찾아갔고 상담을 했고 아파했다. 내 마음이 그렇다고 의사에게 이야기한들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잠깐의 시간이, 사람이 필요했다. 13층에서 내려다보는 주차장은 발을 내딛으면 닿을듯한 거리에 있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는지 눈에 보이는 그 거리감을 마음이 이겨내어 아직까지 살아있다.


밤늦게 느닷없이 나타나 나의 뺨을 때리던 언니는 왜 그랬을까? 언니라고 의지하고 싶어 찾아간 날 정신과 약을 먹으며 겨울날 나뭇가지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나를 향해 사과를 깎다 말고 쟁반을 날려버리며 발로 차던 언니는 왜 그랬을까. 형부라는 사람이 중간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더 처참한 모습으로 그곳을 나왔을 것 같다. 다행히 말리는 그 틈을 타서 더운 여름의 태양과 습도보다 더한 꼴로 다시 혼자여야 한다고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수도 없이 울며 다짐을 했다.

잘 살 거야. 잘 살 거야.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나더라도 난 살 수 있어. 너무 아프고 슬프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는데 아직 내 아픔은 거기까지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주며 그렇게 혼자가 되어갔다.


  

9년 전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무시했다. 나와 아이가 둘이 되었을 때 "네가 이제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하는데 내가 왜 여기로 내려와 살아야 하냐!"라고 매정하게 돌아서던 엄마.

엄마의 기준에 우선인 돈이 이제는 여유롭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아픈 아이를 두고 새벽에 일하러 가시는 아빠 밥을 해줘야 한다며 올라가던 엄마. 그 엄마가 쓰러졌다고 하는데, 오히려 마음은 담담했다.

그래도 친정이라고 추석날 찾아갔더니 이혼 한거 알면 동네 창피하다며 가라고 해서 평상시 1시간 거리를 5시간이나 걸려 내려오며 쏟은 눈물이 생각났다. 화성휴게소에서 빵과 커피를 사서 아이와 나눠 먹으며 왠지 부자가 된듯 한 느낌을 받은 건 왜일까? 돈 아낀다고 그 흔한 휴게소 음식 한번 마음 놓고 사 먹지 못한 나에 대한 선물이었다.

그 선물의 가치는 장발장이 배가 고파 훔친 빵에 비례할까?


그 뒤로 3년이 흐른 뒤 다시 찾은 친정에는 싱글 침대 두 개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란히 앉아계셨다.

엄마, 아빠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마르고 주름지고 표정이 굳은 그 노인이 일어나 된장찌개를 끓이고 압력밥솥 추가 돌아가는 시간만큼의 정성을 보여주었다. 엄마의 최대의 만찬은 된장찌개다. 한 여름에도 새로 지은 따듯한 밥에 적당히 누룽지를 눌려 여주는 숭늉 디저트까지 대접받았다.

그렇게 가족이란 테두리에 다시 들어갔고,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모니까 그래도 부모니까 잘 지내보리라 마음먹었다.

나를 위해서 부모를 찾았고, 언니를 찾았다.

다시 내 휴대폰에 가족의 이름이 저장되었고 일주일에 두세 번 버튼을 누른다.
귀 위에 있는 종양이 눌러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엄마는 스무 번이 울려도 받지 않는다.

나와 엄마와의 시간의 거리만큼이나 긴 시간이다.

낯선 곳에 통증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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