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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Jul 30. 2019

밥은 내게 그리움이고 매일 해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밥은 상처에 붙이기만 해도 아픔이 사라질 것 같은 작디작은 밴드이다.

하루는 참 많은 사연들로 차곡차곡 만들어지지만 일주일 한 달은 빨리 지나가는 듯하다. 그 하루의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살아갈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다른 날이 있기에 희망을 가지고 또 내일을 맞이하는 것 같다.

내 어릴 적 엄마는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엄마. 그 엄마는 40년 전에 신경외과를 다니면서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아빠와 닮았다는 이유로 남동생을 때렸으며, 낮잠이 깊이 들어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니는 자다가 봉변을 당했다. 현관 유리의 깨진 파편이 우리의 하루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밤이면 쫓겨나 거리를 방황할 때 가끔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여인숙으로 향했다. 또 왔냐는 눈빛으로 주인은 우리를 맞이했고 웅크리고 자다가 졸린 눈을 비비고 새벽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갔다. 여름이면 길을 가다 들마루에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손으로 모기를 쫓아주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기도 했다.

가끔 나를 예뻐하시는 아주머니네 집에 가서 잠을 자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방하나에 담긴 웨하스처럼 얼기설기 다리를 맞대고 잠을 잤다.

엄마의 주머니에는 항상 열쇠가 있었고, 아빠가 잠든 새벽이면 어디에서 잠을 자건 우리는 집으로 갔다.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주었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밥은 엄마에게 미안함이었고, 사랑이었고, 마땅히 해야 할 숙제였다.


을 하다가 창문에서 엄마가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반가워 손을 흔들었다.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던 엄마.

그때는 엄마가 아프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지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들어주던 꽈배기도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만들어 주던 카스텔라도 쫓겨나는 하루도 모두 그냥 일상이었다.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고 다음날을 맞이했다.


15평의 아파트. 엄마는 장판에 가끔 니스를 칠해서 바닥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동생하고 양말을 신고 썰매를 끌고 태워주던 기억이 난다. 그곳의 안방 장롱에서 엄마가 아빠의 넥타이를 꺼내 나와 동생과 언니의 목에 묶더니 당겼다. 반질반질한 장판 위로 끌려다니며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이 이어졌던 것 같고 언니가 "왜 우리가 죽어야 해?"라고 소리치며 엄마의 손을 잡아당기자 넥타이를 당기던 손이 언니에게로 가서 무차별로 때리는 무기가 되었다. 우리는 언니의 희생 아닌 희생으로 살아났다. 동생과 나는 무서워서 맞는 언니를 바라보며 엉엉 울기만 했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그렇게 아픔을 표현했는데,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버려질까 두려웠고 아빠의 폭력에 나를 막아줄 방패는 엄마뿐이라 늘 엄마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였다. 엄마의 말이 곧 나의 말이고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복종만 하면 나는 '엄마에게 착한 딸'이라는 당근을 먹으며 자라났다.


엄마 때리지 말라고 앞에 나서서 막는 언니와 동생은 아빠에게 엄마를 대신해서 많이 맞았다. 나는 다가서지도 못하고 뒤에 서서 엉엉 울기만 했다. 나약했고 두려웠고 무서웠다.

언니의 교과서가 불에 훨훨 타서 재가되던 날 밤에 엄마는 나에게 신경안정제를 손에 쥐어주고 언니만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무리 힘든 날에도 따듯한 밥을 해서 주던 엄마처럼 나는 두 살 아래 동생과 나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꼭 먹고 학교에 갔다. 다행히 아빠는 학교에 오지 않으셨다. 학교만이 나의 유일한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었다. 밝게 웃었으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공부도 꽤 하는 모범생이었던 나였지만 밤마다 아빠의 술 심부름을 해야 했고 동생과 무서움에 손을 꼭 잡고 숨어있는 나약한 아이였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엄마가 보고 싶어 동생과 울었으며, 빨리 엄마가 우리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리 소원을 빌었다.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지냈지만 친구들도 선생님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하는 이중생활을 잘 해내는 영악한 아이였다.


세월이 흘러 한 아이의 엄마로 지내는 나는 그 옛날 엄마가 했던 것처럼 밥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질보다 양이라고 밥 욕심이 정말 많다. 밥때가 되었는데 밥을 못 먹으면 화가 나고 예민해진다. 내 몸이 아무리 아파도 아이가 밥을 먹고 가도록 그 옛날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따듯한 밥을 해서 준다. 아이가 밥을 먹지 않으면 화가 난다.

마치 내가 거부당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아침은 "엄마! 오늘은 뭐 먹어?"로 문을 연다. 연합고사 보던 날. 쫓겨나서 밤새 거리를 헤매다 새벽녘 집에 돌아와 엄마가 해주는 따듯한 밥에 김장김치를 길게 찢어 먹고 시험을 봤는데 장학생이 되었다. 내생에 최고의 진수성찬을 먹은 덕이다.


밥은 내게 그리움이고 매일 해야 하는 숙제가 되었고 상처에 붙이기만 해도 아픔이 사라질 것 같은 작디작은 밴드이다.


상처라 명하지도 못한 '싱글맘'이라는 단어를 꼭꼭  숨긴 채 세상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뱉는다.

세상이여! 찾아라. 이번에는 네가 술래다.

그리고 외쳐라!

싱글맘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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