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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Aug 04. 2019

커밍아웃

싱글맘이에요.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능숙하게 몸에 배어버린 그 옛날의 소녀 가장답게 인생을 계획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쉬자! 3개월만 쉬자! 그리고 다시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다행히 내게는 취업이 쉬운 자격증이 있었고 경력이 있었고 그 일을 열심히 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이라는 그 이름.

싱글맘이 되고 맞은 6개월의 휴식. 요가와 댄스를 함께 수업하는 곳에 등록했다. 명상하는 시간에는 눈물을 훔쳤으며 춤을 추는 시간에는 몸짓에 슬픔을 감추었다.  30대의 마지막 해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 6개월의 휴식을 딛고 10년을 달려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싱글맘으로서의 위치를 당당히 표시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그가 빛날 수 있도록 영역표시를 해보려 한다.

누군가는 나의 삶을 보며 또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기에.

 


아이는 열이 40도가 다돼가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이스팩에 항생제를 넣고 약병에 아이 이름을 쓰고 밝아오는 여명에 의지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유치원에 내려주고 아무도 없을 적막함에, 아픔에, 헤어짐에 못내 아쉬워 하지만 '싫다!'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6살의 아이가 나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 잘 다녀와 사랑해" 품에 안긴 아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뜨거워진 눈물을 허공을 향해 쏟아내어 보지만 이내 흐르고 만다. "엄마가 원장님께 이야기하고 데리러 올 수 있으면 일찍 올게. 점심 잘 먹고 약도 잘 먹어야 해."

일터에서 내 아이와 같은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하며 열은 없는지 왜 배가 아픈지 내 아이를 돌보듯 정성을 다했다. 오후 차량 운행을 마치고 달려간 아이는 원감 선생님(교감선생님) 실의 소파에 누워 있었다. 선생님이 출장을 가셔서 대신 돌봐주신 교감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아이가 누워 있을 곳은 구석진 자리의 한 켠이었다. 오늘도 밤을 새워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가 누울 곳 조차 마땅치 않아 맘이 아프다. 저려온다. 그래도 내 곁에서 돌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만들고 붙이고 오리기를 한다.  12시가 넘은 시각에 일거리를 싸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여전히 힘이 없고 물만 찾는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재우고 다시 만들고 오리고 붙인다. 갈기갈기 찢긴 내 상처를 이어 붙이듯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아이와 단둘이 남겨진 딸의 모습이 보기 싫어 아이를 봐줄 수 없다는 친정엄마한테 꼭 잘 사는 모습을 보이리라 마음먹었지만 이런 날이면 원망이 앞선다. 아이를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새벽에 할 수 없이 아이의 친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아이가 아프니 집에 와서 아이를 봐주세요." 한참 말이 없더니 가스에 뭐 올려놔서 불 끄러 가야 하니 끊는다고 한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아이의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이를 키울 수 없으면 자신이 키우겠다고 한다. 왜 우리 엄마한테 아이를 봐달라고 하냐면서......

다시는 전화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는 또 아무도 없는 유치원에 약과 함께 내려졌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의 열도 내렸다.

그렇게 그렇게 아이는 자주 열이 났고 일상이 반복이 되었다.

1년이 지나고 정원 7명의 작은 어린이집으로 옮겨서 아이가 유치원에 있는  동안 시간제로 일을 하였다.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에 음악회도 다니고 도서관에도 자주 갔다. 몸으로 부딪히며 놀이터에서 함께 뛰고 계곡에서 함께 보트를 탔다. 이웃 도시에서 하는 공연에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아이와 함께 그려나가다 보니 벌써 아이는 나보다 훨씬 큰 아이로 자라났다.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 버린 아이는 사춘기를 맞이하고 있다. 밖에 나가는 게 싫은 아이. 엄마가 방학이라 여행을 가자고 해도 집에 있는 게 좋다는 아이. 눈 뜨면 유튜브 세상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

그 아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목표가 생겼으면 하는 것을 바라는 엄마.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만 아이의 사춘기의 하루하루가 빛이 나게 지냈으면 좋겠다.


10대. 나에게 찾아온 사춘기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슴이 나오면서 아름다운 여자로 가는 길목에 섰다는 것을 혼자 인식하기에 나는 너무 무지했다. 그 가슴을 감추기 위해 어깨를 구부정하게 했다. 습관처럼 돼버린 그 자세가 삽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걸음걸이로 자리 잡았다.

속옷을 고르는 법도 몰랐다. 그냥 예쁘고 딱 맞는 속옷보다 누군가가 건네 준 가장 싼 속으로 나의 감추고픈 가슴을 감싸 쥐었다. 지금도 한없이 작은 내 가슴이 그때는 왜 그리 커 보이고 창피했는지.

옷에 드러내지는 그 모습에 당당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왜 없었을까.


내 아이가 사춘기의 징표를 나타낸 날.

둘만의 조촐한 파티를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아이와 기념사진을 찍고 이렇게 글을 남겼다.


당당하라! 지금 네 모습이 제일 아름답게 빛나도록 자신 있게 걸어라. 아무도 너의 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렇듯 누가 나를 보는 것 같고 피부의 변화에도 머리카락의 흐름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내가 누리지 못한 당당함을 아이가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것 또한 어른의 입장임을 새삼 깨닫는 여름이다. 묵묵히 그 나이의 변화를 감당해내고 있는 아이는 다시는 맞이하지 못할 하루하루를 무던하게 지내고 있다.


치열했던 나의 십 대와는 너무나 다르게 게임의 세계에서 타인을 만나 사회성을 키우고 있으며, 손바닥만 한 세계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선에 초점이 맞추어져 클릭 한 번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의 세상을 나무랄 수 있을까?

스마트폰을 사준 것도 아이에게 단호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나인 것을.


이성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싱글맘.

그 자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아이도 나도 잘 지내왔고, 잘 지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지낼 거라 믿는다.


아들! 한 가지만 부탁하자.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다가 꼭 해야 할 말이 생겼어.

혹시라도 엄마에게 마지막이라는 상황이 오면 꼭 알려주기를 바라. 마지막인데 내가 나에게 별할 간이 필요해. 엄마의 인생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기 싫어. 여행도 하고 별을 보고 바다를 보며 엄마 인생에게 마지막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어. 엄마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나온 것처럼 내 삶의 마지막을 알며 준비고 싶어.

정해 줄 거지?


죽음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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