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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Aug 17. 2019

20분 거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하루의 몫

정리를 하고 우리 곁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던 그 사람은 격한 노동이 주는 고뇌를 몸에 감싸 안은 듯 미친 듯이 장작을 패고 있다. 다른 곳으로 달려갔던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멀리서 그 사람을 지켜보는 나도 아팠다.

그때 울리는 벨소리에 직감적으로 불안했으며 떨리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

"가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나도 같이 가자. 밖에서 기다릴게"

20분 거리 그 여자의 집으로 갔다. 아이는 잠들었고 "금방 올게.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라고 말한 그 사람은 30분이 돼도 내려오지 않았다. 차에서 내렸다 올라탔다를 몇 번 반복하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5살. 아빠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다가 깨서 아직 오지 않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 받지 않거나 모임에 갔다고 하면서 '20분'이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20분이란 거리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내 남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 사람의 큰누나가 집에 놀러 온 날 지나가는 말로 "술 한잔 마시면 그 사람이 차에서 잠들어 집에 못 오는 날이 많다"라고 말을 했다. "너, 남자를 믿으면 안 된대. 뭐 이상한 거 없었어?" 수녀님인 누나의 입에서 친구가 그랬다며 믿지 말라는 말을 할 때 그런 일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을 했던 나였다.  그 뒤로도 그 사람은 술을 먹고 차 안에서 자는 일이 많아졌지만 하루는 성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아이와 힘드니 학원에 나오지 말라고 했고, 학원의 일과를 전화로 이야기해주는 그런 배려심 깊은 남자였다. 정말 안 나가도 될까?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학원으로 향했다. 평상시 같으면 내 사무실로 갔을 텐데 아이가 소풍을 가서 김밥을 쌌고, 차에서 잠이 들어 못 들어온 그가 갈아입을 옷을 주려고 그의 사무실로 갔다. 아침 차량 운행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는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 떨어지는 쪽지 하나.

 


보고 싶어. 오늘은 집에 있으니 전화를 하면 안 되겠지?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데도 빨간 날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싫다. 혹시 여기 오면 나와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없네. 많이 많이 사랑해.


뭐지? 하루 종일 같이 있는다고? 설마? 쪽지를 끼워놓고 꿈꾸던 그들의 관계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책장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는 사진들. 둘만의 시간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 뭐했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고 도착해서도 한참이나 그 안에 있었다.


"원장님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어요?"라고 묻던 20대의 그 여자.

취해 그 남자와 우리 집에 와서 술주정을 할 때 꿀물을 타  그 여자.

집에서 모임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도와주던 그 여자.

학원생들과 대천바다에 놀러 갔을 때도 함께했던 그 여자.  

외식을 할 때도 지나다가 들려서 함께 갔던 그 여자.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타향에 와서 혼자 고생한다고 챙겨던 그 여자.


그 여자와 나를 둘 다 사랑한다며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 남자가 그 여자를 만나러 가서 오지 않는다.

경찰이라는 그 여자의 사촌오빠가 내려와 차문을 가볍게 두드린다.

전날 밤 그 남자는 이제 둘의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고 그 남자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으로 자해를 한 것 같다고 한다. 팔을 여러 번 그었으나 가벼운 상처뿐이란다.

사촌오빠를 따라 올라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부모에게 맞고 있었고 그 여자는 때리지 말라며 그 남자의 무릎에 앉아 그 남자를 안고 있었다. 부모가 때리는 매를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는 그 여자.

"원장님! 이혼하세요. 유산도 몇 번 했었다는데 알고 있었어요? 내 딸이 죽겠다는데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원장님하고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이혼하세요!" 그 여자의 엄마가 내게 내뱉는 말은 미안함은 담겨있지 않았고 성난 외침이었다.


"당신하고 나에게 '우리'는 이제 없어."

이 말 한마디를 내뱉고 정신없이 집으로 향했다. 지하차도를 지나다 문득 드는 생각이 그 남자가 융자금을 내지 않으면 집이 없어지게 생겼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현실적이고 정이 뚝 떨어지는 생각이다.

다시 돌아가 그 남자에게 "융자금은 앞으로 내가 낼 거야!"

덜렁 통장 하나 받아 들고 20분을 달려 집으로 갔다.


밥을 먹고 있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초대하지 않은 눈물은 계속 찾아오고 "엄마! 왜 울어?"하고 묻는 아이를 와락 껴안고 흐느끼다 "밥 먹고, 샤워하고 산책하러 갈까?" 좋다고 외치는 아이를 또 바라보았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일을 알게 된  한 달 동안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12kg이 빠졌고, 물만 삼키며 생명을 연명하고 있었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마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잠이든 후 그 남자의 짐을 모두 그 남자의 차에 옮겨 놓았다. 수없이 반복되는 길을 왔다 갔다 하며 작은 것 하나라도 내 집에 남겨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차 안에 짐을 옮겨 놓았어. 아이 아빠니까 행복하게 잘 살아. 아이가 나중에 찾을 때 뭐라도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라고 문자를 보냈다.

 

늘 배려해야 인정받는다는 느낌으로 살았었다.

나는 멀리에 두고 살다보니 착하고 여린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타인은 관심을 가졌고 나를 보여주지 않음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불어 닥친 담이 무너져 내릴 때 나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벌거벗은 아기처럼 혼자였다. 더 나약해져 갔다. 정신은 피폐해져 갔고 나의 내면을 끌어올리기에 한 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난 엄마였다. 나의 끝을 잡고 있는 아이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랬다. 한 사람의 나는 망가졌지만 한 사람의 엄마는 살아나야 했다.

싱글맘.

그런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이혼녀라는 멍울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

배신으로 인한 아픔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내게는 사치였다.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서성였고 다가오지도 않는 미래를 그려나갔다. 상상 속 현실은 점점 내게 멀어졌고 아이가 태어날 때가 됐으니 이혼해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건 당신의 입장이다.

나의 입장은 아직 홀로 설 자신이 없다.  아이가 찾는 아빠라는 단어의 의무를 다한다면 난 당신과 갈라설 마음이 없다. 아직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 버려지는 게 너무 싫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의지하게 된 유일한 그 사람.

아팠던 옛날은 잊게 해 주겠다던 그 사람은 가족보다 더한 상처를 내게 던져주고 말았다.

아팠고 또 아팠다. 또다시 찾은 상담실에서 상담자는 40분이 다됐습니다. 추가 비용 있는 거 아시죠?

"그래, 알아!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내가 하는 말은 째깍대는 소리만큼 돈을 지불해야 하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하는 무료 상담소도 유학을 다녀왔다는  대학교수도 의무 방어전에만 익숙한 듯했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선생님!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해 준 그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난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까?

사무실 집에서 시간을 정하지 않고 나의 아픔을 그대로 들어주던 그 선생님을 만나고 나는 다시 이성을 찾고 밥을 먹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 갔다.


그 사람과 공유했던 건 집이라는 덩어리만 남기고 모두 버렸다.

덩그랗게 버려진 공간에 아이와 내가 손길을 준다 해도 조경석이 무너져 내렸고, 열매를 잘 맺던 나무가 죽어갔고, 인기척 없는 낮시간에 타인들이 내 집을 드나들었고, 흐트러지게 자태를 뽐내던 야생화는 자신의 영역 넓히기에만 급급해서 뽑아도 뽑아도 사라지지 않는 본연의 모습에만 익숙해져 갔다.  점점 주변 사람들이 본심을 드러냈고 아이와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지해갔다. 낯선 사람보다 매일 얼굴을 맞대던 사람들의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을 만나며 점점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려갔다.

그렇게 아이와 나만의 5년이란 시간을 보낸 끝에 친정 옆으로 이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아무도 모르는 P시로 이사를 했다.


타인은 내 불행을 기회로 삼았다.

남자라고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여자와 아이만 사는 시골 외딴집은 타인의 먹잇감 후보 1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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