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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Sep 11. 2019

싱글맘의 명절 보내는 법

누구나 처음이라는 단어는 마주하기 두렵다.

아이와 둘이 처음 맞는 명절이 추석이었다.

11년 전 아직은 서류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김치를 먹게 되더라도 나눠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아이의 친할아버지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나는 아이를 데리고 예산으로 향했다. 아이에게 명절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아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마저 빼앗고 싶지 않았다.

친정부모님보다 의지를 많이 했던 시부모님이었기에 아마도 그쪽에서 연락을 끊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왕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와 추석을 보내고 온 날 그 남자한테 전화가 왔다.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는데 왜 우리 집에 갔었냐고.

아이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니까 당신하고 상관없이 아이가 원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원하면 관계를 계속 이어갈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기우였다.

추석을 끝으로 인연도 끝이 났다.


  며칠 전 아이에게 물었다.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집이 외갓집에서 30분 거리니 만나고 싶으면 데려다준다고 했더니 아이는 "왜?"라고 물었다.  너의 생물학적 아버지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만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이는 단칼에 "안 보고 싶고, 궁금하지도 않아."라고 했다.


생각을 하고 답을 했더라면 나았을까?

아이의 상처가 느껴지기에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두 번째 맞는 명절인 설날.

귀성길 차량이 밀린다는 뉴스도 시댁에 가는 게 싫다는 말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아이와 갈 곳이 없는 나는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친정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마치 이혼 제공의 원인이 친정부모님인 것처럼......


날 아침 아이와 따듯한 밥을 해서 먹고 조조영화를 상영하는 메가박스로 향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풍경은 오랫동안 꿈에서도 만났었다.

아빠와 남매가 한 팀, 저 멀리에는 아빠와 딸 하나, 그리고 나와 내 아이가 손님의 전부였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연이 있으리라는 짐작만 했을 뿐 서로 아무 말 없이 아이들과 영화 보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집중하고 싶었지만 어른들끼리는 목인사를 나누었던 것 같다.

만화영화가 상영 중이었고, 어른들은 서로의 처지를 안다는 듯 목인사 뒤에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팀이 일어나고 한참 뒤 한 팀이 일어났다. 나는 아이와 끝까지 앉아 있다가 불이 다 꺼질 때 즈음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영화관은 나의 친정이었고 음식의 향기를 주었고 가족의 따스함을 주는 종합 선물세트를 안겨주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가 두 편 있다.

같은 마음을 느꼈고, 같은 마음으로 울었던 영화

[해운대]와 [7번 방의 선물]

1. 부성애 가득한 아빠의 마음을 내 아이가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 울었고,

2. 저런 상황에서도 아빠가  아이를 사랑하는 게 부러워서 더 울었다.


그때는 몰랐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 느낀다는 것을.

그 영화가 주는 감동은 참 많았을 텐데 내게는 그것만 보이고 그것만 느껴졌다.


그때 생긴 영화보기가 습관이 되어 지금도 영화는 빠뜨리지 않고 보는 유일한 나와 아이가 하는 공통 취미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햄버거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서 어제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는 했다.

처음에는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아
식당을 가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두려웠다.

두려움이 쌓여서 익숙함이 되는데 필수조건은 시간이다.




남동생이 실업자가 되어 방황하던 시절이 내가 괴로워하던 그때와 맞물렸었다.

남동생은 서울 집을 정리하고 부천으로 이사를 갔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낸다고 연락을 해왔다.

남동생은 나에게는 특별하다.

그때 내 아픔도 컸지만 동생의 아픔도 느껴졌고, 실업자가 된 동생하고 사는 올케가 여자로서 안쓰러웠다.

내가 나를 위해 돈 한 푼 못쓰고 혼자가 되고 보니 올케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올케를 위해서 돈을 써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올케만을 위한 돈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올케에게 아무 말하지 말고 계좌번를 불러달라고 했다.

알려주지 않으려는 올케에게 내가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올케도 잘 살 때 올케를 위해 돈을 써보지 못했을 것 같아서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 나를 위해 알려달라고 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200만 원을 송금해 주었고, 그 돈은 올케를 위해서만 쓰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 물어보니 생활비로 썼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돈은 내가 낼 테니 가족상담을 받자고 했다. 내가 상담을 받고 좋아졌으니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상처를 가진 동생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올케네 가족이 행복해질 거라고 설득을 했다.

동생네 가족은 주말마다 내려와 외로운 우리 모자와 함께 보냈다.


한해의 일출을 같이 보러 산을 올랐고, 아이들에게 고스톱을 알려주고, 함께 놀러 가기도 했다.

그해의 설날은 동생과 함께 보내서 외롭지 않았다.

그때 가족상담의 힘으로 동생은 재기에 성공했고,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금전적으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케와 아이들이 행복해하니 누나로써  동생을 생각하면 대견하고 기특하다.


아이와 둘이 맞은  번째 명절인 추석날은 엄마네 갔다가 쫓겨왔다.

동네에서 딸이 이혼한 것 알면 창피하다는 게 이유였다.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원초적인 이유이기에

나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휘청했다.



남동생도 엄마네 집은 가지 않는다.

올해도 동생네 가족 대신 과일과 고기가 택배로 배달됐다고 한다.

올해 설날.

6년 만에 큰 마음먹고 엄마네 집을 찾았던 동생은 또 상처를 받고 엄마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동생네 딸이 삼수를 해서 대학 입학을 앞두었는데, 친정엄마는 공부하느라고 고생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너네 아빠가 너 공부시키느라 고생하는 거 알지? 너에 아빠한테 잘해라"라고 했단다.

그걸 올케가 옆에서 들었고 동생한테 서운하다고 했단다.

동생은 내게 전화해서 "내가 능력이 되니까 내 돈으로 내 아이 삼수시켰는데, 왜 엄마가 십원 하나 보태주지 않았으면서 그런 말을 해? 할머니면 할머니답게 아이들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그러지 왜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 돈을 앞세우는 건데?"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늘 자식을 돈으로 평가했고, 돈으로 줄을 세웠다.

돈 많고 잘살고 용돈 많이 주면 그 자식한테 연락을 자주 했고 나머지 자식 둘은 뒷전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한 게 작년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옛날 사람이 자식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음을 알기에 엄마를 안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엄마네 집에 가지 마. 큰 맘먹고 발걸음 했는데 속상해서 어쩌니? 올케한테도 미안하다고 대신 전해줘."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 엄마를 올케가 이해하는 건 쉽지 않기에......


나는 내일 아침이면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겨 친정으로 갈 생각이다.

엄마가 드시고 싶다는 치즈는 며칠 전부터 냉장고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엄마가 전화하셨다. 계란 두 판과 우리 동네 방앗간에서 송편을 사 오라고 하신다.


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발걸음은 가벼워질 것 같다.


쌍무지개 같이 나와 평행선을 걸었던 

엄마와 함께 보낼 명절은

몇 번이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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