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숙명 설거지에 관하여.
설거지.
설거지란 무엇인가.
설거지는 누가 하는 것인가.
누군가 설거지는 참 철학적인 주제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이 설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얘 너 나와라, 너 설거지도 못하잖아”
역시나 우리 어머니의 말씀인데 그렇다고 내가 시댁에서 설거지를 안 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아니다.
저 말은 시댁 부엌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설거지도 못한다는 그 며느리는 여전히 시댁에서 열심히 설거지를 한다.
보통 명절에는 시댁에만 갔는데 결혼하고 몇 년 후 갑자기 큰집에서 명절 당일에 모이기로 했다. 큰집이라 하면 남편의 큰아버지 댁으로 시댁과는 거리가 꽤 멀었지만 그래도 수도권 내 지역이라 당일에 가기엔 무리가 없었다. 여유를 부려서인가 시부모님과 우리는 명절 교통체증으로 인해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에 도착하여 우리의 점심을 따로 차리게 만드는 아주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명절 당일 점심을 두 번이나 차리고 있는 큰댁의 며느리였다. 속으로 얼마나 우리 가족을 욕했을까 싶다. 죄송하다고 하면서 점심을 먹는데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친정에 가지 못하는 그분이나 나나 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나니 남은 것은 우리 식구가 먹고 난 후의 설거지거리들이었다. 당연히 아버님과 남편은 다른 가족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거실로 가셨고 부엌에는 나와 어머니, 시누이 그리고 큰 댁의 며느리가 있었다. 시누이는 자신이 설거지를 한다는 건 꿈도 꾸지 않는다는 듯 사촌들과 과일을 먹으며 식탁에 눌러앉아있었고 나는 개수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다 수세미를 들었다.
남편 큰아버지(백부님)의 며느리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호칭도 잘 모르겠다. 그분도 나에겐 손윗사람이니 형님이라고 칭한다면, 형님은 나름 당신의 시댁이라는 생각이었는지 나에게 “제가 할게요. 하지 마세요.”라고 예의를 한 번 차려주었다. 물론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저희가 늦게 와서 죄송해요.”라고 답했지만 어차피 같이 하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렇게 부엌 개수대 앞에는 며느리 둘이 서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설거지 같이 하겠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밥상 차림에서 시작하여 설거지로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큰어머니(백모님)께서 달려오시더니 나에게 “어머 손님인데 설거지를 하고 그래! 하지 마, 하지 마”하고 말리셨다. 그때 나의 어머니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그래, 얘 너 나와라, 너 설거지도 못하잖니”하면서 설거지를 그만하게 하셨다.
나를 설거지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마음이었다면 성공하셨다. 그리고 또 설거지도 못하는 며느리로 면박 주고 싶으셨다면 더욱더 성공하셨다. 굳이 거기서 “너는 설거지도 못하잖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설거지를 관두게 하실 건 또 무엇인가. 그 짧은 찰나에 소심한 나는 내가 시댁에서 설거지했을 때 잘 못했었나? 어떤 게 마음에 안 드셔서 설거지를 못한다고 큰집 식구들 다 있는데 면박을 주셨을까? 등 온갖 생각을 다 하며 손을 대충 털면서 부엌에서 물러났다.
안녕히 계세요. 설거지도 못하는 며느리는 퇴출당합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것은 시댁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설거지는 나의 몫이 된다. 설거지 못하니까 아들을 시킨다거나 시누이가 한다거나 아니면 답답해서 어머니가 직접 하시는 일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사실 결혼하고 난 후 친구들과 설거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다들 귀한 집 딸로 커서 설거지도 안 하고 살았는데 시댁에서 혼자 설거지하고 있으려니 속상하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중 한 친구가 “난 남편이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 말은 모두의 부러움을 샀고 왜 내 남편은 그렇게 못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 시댁은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지 비교하게 만드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만약 내 남편이 엄마 아빠 계신 우리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면 나도 억울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위가 밥 먹고 설거지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며느리가 설거지하는 일은 당연시 여겨지는 게 참을 수 없었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너 시댁 가면 네가 설거지해야 하는 거야. 네가 요리해 드리는 것도 아닌데 설거지라도 잘해야지”라고 연신 가르치며 강조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너 처갓집 가서 설거지해야 하는 거야”라고 가르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을까?
나는 집안일 중 설거지를 싫어하진 않는다. 귀찮기는 하지만 막상 하다 보면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과정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시댁에서 설거지하는 게 싫었다. 사위는 손님이고 며느리는 일꾼이라는 의식도 싫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사위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고 있었고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혼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남편과 시누이, 시부모님은 텔레비전 앞에서 깔깔대며 놀고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혼자 설거지를 할 때 가장 외로웠고 내가 이 집안 식구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나씩 해나갈 때마다 결혼이 여자에게 불리한 제도라는 것에 그릇으로 한표 한표 던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댁에 다녀온 후 남편과 설거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보도 시댁에서 나랑 같이 설거지하면 안 돼? 아니면 점심은 내가 하면 저녁은 여보가 해주던가”라고 말을 꺼냈다. 남편은 매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한참이나 망설였다. 설거지 같이 하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둘이 사는 집에서 하는 설거지는 갈등의 소재가 아니다. 사실 누가 설거지를 하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설거지를 하면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집안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남편에게 들은 대답은 참 가관이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설거지를 한 적이 없어.”
아니, 누구는 설거지를 많이 해봐서 그래? 나는 여보 집에서 설거지하면서 컸어?
“여보, 여기에선 앞으로 내가 설거지 맨날 할게. 내가 설거지 다 할게. 우리 집에서만은 여보가 설거지해줘”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게 만드는 남편의 말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독하게 평생 집에서 설거지만 시켰어야 하나 싶지만 오죽하면 저렇게 말할까 싶어서 그냥 시댁에서 난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시댁을 다녀온 후 며칠은 남편이 내 눈치를 보며 더 열심히 설거지를 해주긴 했다. 며느리에게 설거지를 맡기는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저런 마음을 가지고 집에서 죽어라 설거지하는 것을 알까. 시댁에서 설거지를 하루 종일 하고 온 며느리의 불똥이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싶은 귀한 아들에게 튈 거라는 큰 그림은 보지 못하시나 보다. 신혼 때에는 남편이 눈치 보며 설거지를 열심히 했지만 결혼 연차가 꽤 된 지금은 남편이 내뱉은 말은 희미한 과거일 뿐이다.
그렇게 난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아이가 엄마를 연신 울며 찾을 때에도 설거지를 했다. 이제 내 아이는 엄마가 설거지하는 걸 당연히 여기며 기다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난 시댁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