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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옥 Dec 13. 2023

멍 때리는 어머니, 골 때리는 늙은 딸

어머니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온다. "하필 오늘, 목욕을 왜 이리 오래 했어요!" 어머니는 낮은 말소리를 잘못 들으니 반응이 늦다. 내 표정을 보고 눈치채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가 많이 늦었나?" 말이 느리고 눈이 멀뚱멀뚱하다. 온천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어머니가 멍 때린다.


12월 둘째 화요일, 대구 황금동에 점심 약속이 있다. 대학동기 여학생 넷이 격월로 만나는 날이다. 팔공 IC에서 황금동까지는 길이 복잡해서 여유 있게 나서야 한다. 어머니가 화요일 아침 온천욕을 포기하지 않아서 시간이 빠듯하다. 이미 마음이 바쁜데 온천욕을 평소보다 20분이나 더 하고 슬렁슬렁 나온다. 20분 동안 기다리며 혼자 짜증 내다가 한숨 쉬다가 씩씩거린다. 참다가 기어이 한소리 내뱉는다. "오늘 대구 간다 했잖아요!" 늙은 딸이 골 때린다.


내비게이션은 11:50 도착 예정이라 한다. 약속 시간에 20분이나 늦다니 속이 상한다. 어머니의 목욕 애착을 혼잣말로 비난해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한참 짜증을 내다가 문득 되묻는다. '할멈들이 밥 한 끼 먹는 자리잖아.' 1분만 늦어도 교실이 소란스럽던 학교수업도 아니고, 좀 늦어도 서로 느긋한 주름진 얼굴들이잖아. 오랜 습성의 노예는 내비게이션을 찍어 도착 시간을 보낸다.


"함머니, 나는 몽치 좋아." 손자가 몽키를 몽치라 해서 웃는다. 걸음이 느려도 즐겁게 끌려간다. 밥을 흘려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어린것들에게 너그러우면서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에게는 까칠하다. 혈관염과 류머티즘으로 어머니는 예전과 다르다. 걸음이 느려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말이 둔해진 어머니, 어머니 곁을 겨우 석 달째 지키며 내가 점점 웃지 않는다고 느낀다. 원래 까칠한 성향인데 어머니의 어두운 표정을 보면서 짜증이 점점 늘어난다. 골 때리는 늙은 딸이 문제야, 어머니 미안하요. 까칠한 목욕타월이 민둥해지듯 무디어가는 늙은 딸이해해 주세요, 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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