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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아이

고만례상회의 문을 열었다. 미닫이 철문이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온 마을을 깨울 듯 크게 들렸다. 불을 켜지 않은 채 계산대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힘겹게 돌에 새겨진 비뚤비뚤한 글자, 가, 만, 례. 그런 세월을 견디고도 사람은 산다… 동굴 같은 죽음으로부터 더 달아날 곳이 없어, 노인은 바다로 향하는 걸까. 허기진 자신을 위해, 허기를 참고 자신을 기다린 가만례를 위해, 고기를 낚는 걸까. 용희 씨는 노인의 저런 모습을 얼마나 봐온 걸까. 노인이 사라질 때마다 노인을 찾고, 노인이 바다에 빠질 때마다 노인을 건져내면서, 그렇게 얼마를 버텨온 걸까. 매일 아침 바위 위의 노인을 바라볼 때마다 용희 씨는 어떤 마음일까. 몇 개 남아있지 않은 노인의 이 사이로 흘러내리던 것들이 지소의 마음에서 놓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가만례와 노인, 용희 씨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냉장고가 윙, 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가 고만례상회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처럼. 

지소는 가게 문을 처음 연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내부를 바라보았다. 고만례상회는 정직한 물건들의 세계, 그 사이에서 꼼짝 않고 있으니 지소 자신도 고만례상회라는 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부분이 된 것 같았다. 그것이 안온한 느낌을 주었는지 지소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딕딕, 디딕, 딕, 디디딕, 딕딕.

잠을 깨운 건 소리였다. 배춘영 씨가 아직도 탁자를 두드리고 있나 싶어 쪽방으로 갔으나 배춘영 씨는 가고 없었다. 쪽방에서는 뭐든 사라진다, 백발노인도, 물고기도, 배춘영 씨도. 꿈이었을까, 배춘영 씨와 매실주를 마신 건. 유리잔 두 개가 꿈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딕딕, 디딕, 디디딕. 규칙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계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 나무토막으로 뭔가를 가볍게 때리는 것도 같고 장작이 타는 것도 같고 작은 돌들이 부딪치는 것도 같은 소리였다. 그것은 가게 안이 아니라 가게의 벽 너머에서 나고 있었다. 끊길 듯 말 듯 하다가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멈추는 종잡을 수 없이 기묘한 소리였다. 

동굴, 동굴이다.

지소는 벽쪽 선반으로 다가가 귀를 대보았다. 벽 너머가 동굴이라는 생각은 즉흥적인 것이었으나 한번 떠오르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느껴졌다. 아까 동굴에 노대기 씨 말고 또 무엇이 있었을까. 불을 켜고 랜턴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계산대 책상에 딸린 서랍을 뒤적거려 굵고 긴 양초를 찾았다. 심지가 불에 타다 말았고 촛농도 묻어 있는 것이 예전에 사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서랍 속을 굴러다니는 라이터를 집어 양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이 심지 위에서 흔들렸고 그에 호응하는 지소의 그림자가 물건들 위로 형체를 만들며 넘실댔다. 촛불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거친 바람이 간간히 불었다. 손으로 막을 만들어 연약한 촛불을 보호하면서 가게 위쪽으로 난 골목길에 들어섰다. 

지소는 용희 씨와 걸었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지금의 이 길은 무섭다기보다 묘했다. 이것이 실제라기보다 꿈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꿈이라면 기이하거나 이상야릇한 것을 만나더라도 고함 한번 지르고 깨어나면 될 일이었다. 공터의 풀무더기 속에서 벙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 입구에 섰다. 

복순이 있었다. 동굴 옆 풀무더기 옆에 앉아 있었다. 제멋대로 웃자란 풀들이 복순의 몸체를 가리고 있어 얼굴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 무척 기이해 보였다. 지소는 놀랐으나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복순을 바라보았다. 복순은 지소를 발견하고서 껑충 뛰어왔다. 품에 스케치북을 안고 있었다.  

“라면 왜 안 끓여줘?”

“그게, 좀 바빴어요.”

지소가 대답하자 복순은 제 자리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여기 있어요? 밤에는 자야죠.”

“밤에는 자야죠, 할머니 자. 복순은 소리를 들었어.”

“소리요? 무슨 소리?”

“동굴 소리.”

복순이 대답했다. 복순은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가 다시 지소에게 다가왔다. 한발 한발 무척 조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발걸음이었다.  

“왜 그렇게 걸어요?”

지소가 물었다. 

“조심해. 여기는 조심해야 해.”

“왜?”

“소중한 게 있어.”

“소중한 거 뭐?”

“지켜줘야 해. 아껴줘야 해.”

복순이 대답했다. 정말 소중하고 연약한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애틋함이 복순의 말과 몸짓에서 드러났다. 

“저 안에 뭐가 있어요?”

“가보면 알아. 근데 들었어, 소리?”

“그게…”

“동굴이 불렀어?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

지소는 복순의 말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지소가 동굴에서 나는 소리라고 짐작한 그것이 복순의 말대로 동굴이 부르는 소리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동굴이 허락한 사람, 이라는 준희의 말이 생각났다. 동굴이 지소를 부른 것일까, 지소를 허락한 것일까, 그걸 어떻게 아나. 지소가 망설이자 복순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안돼, 안돼!”

복순이 소리치며 지소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켜줘야 해, 아껴줘야 해!”

“들었어!”

지소가 말했다. 

“정말?”

“그래.”

복순의 얼굴이 환해졌다. 들었다, 들었다 소리치면서 제 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기분이 좋은 거야?”

“좋아. 라면 끓여줘서 좋아.”

“내일 끓여줄게.”

“좋아. 외롭지 않아서 좋아.”

복순은 지소의 주위를 한바퀴 돌더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지소가 들은 그 소리가 복순이 말한 그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지소는 복순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동굴 입구에 섰다. 들어가 보면 만나게 될 그것이 무해할 거라는 건 복순의 태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만나보면 알 일이다. 지소는 동굴로 들어섰다. 

발 아래를 조심하고 머리 위도 신경 쓰면서 천천히 걸을 때, 디딕, 디디딕, 딕, 하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분명했다. 팔을 뻗어 촛불을 앞쪽으로 비추었지만 불빛은 고작 한 걸음 앞만 어렴풋이 밝힐 뿐이었다. 삼거리에서 해안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소리가 멀어졌다. 이 방향이 아니다. 저쪽이다. 지소는 막힌 동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딕딕, 디딕, 딕, 디디딕, 딕딕. 소리가 선명해졌다. 그러나 동굴의 막힌 벽까지 걸어도 소리의 정체를 찾을 수 없었다. 소리는 벽 너머에서 나고 있었다. 동굴의 벽 너머. 그곳이 어디일까, 막혀버린 벽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라고 지소는 생각하다가 반달섬에 온 첫날 측량기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가게 후미가 땅 밑으로 들어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공백이 아닐 수도 있겠어. 막힌 동굴은 숲이 아니라 고만례상회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가게 뒤편에 동굴의 반대편 입구가 있는 것이다…


                                                                                         *


지소는 가게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 들이킨 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딕, 딕, 디딕, 디디딕, 딕.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지소는 깨달았다. 소리가 지소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것이 꿈이라 해도 고함 한번 지르고 깨어나면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동굴의 검은 벽에서 춤추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지소는 직감했다. 무언가 지소에게 오고 있다, 이대로 그것을 좇아 나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원래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그냥 이대로 고만례상회를 나가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지소는 느꼈다. 동굴이나 소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김을숙 씨가 오든 말든 열쇠를 적당한 곳에 놓아두고 이곳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다시 올 일 없고 만날 사람 없으니 그렇게 간다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런가, 그러면 되는 것인가, 이곳은 어울리지 않고 어쩐지 위험하므로 더 안전한 곳으로, 더 알맞은 곳으로 떠나는 게 좋은가. 그런데 정말 그런 곳이 있나, 안전한 곳이, 되돌아갈 곳이, 있었나…… 

다가올 그 일이,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지소를 향해 다가오는지 이유를 따지는 건 의미 없을 것이다. 어차피 랜덤이고 무작위라면, 무의미의 세계에 얼마간 머물러보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렇지, 꽝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지, 지금도 꽝인데 또 꽝이 나온들, 그렇게 치명적일 건 없지 않나. 더 아래로 추락할 일 없는 사람의 결론이란 이렇듯 단순하고 강력하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무서운 일이 없겠다… 그런데 왜 지소는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많은 걸 헷갈려 하고 허둥지둥하다가 결국엔 도망치듯 그렇게. 계산기를 쳐대고 답이 나오길 안절부절 기다리면서 그렇게. 손에 쥔 카드는 꽝이면서 꽝이 아닌 것처럼, 꽝인 줄 뻔히 알면서 아닌 척 그렇게. 사실 나는 꽝이잖아… 지소는 혼잣말을 했다. 콧구멍과 입술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새어나오면서 허헛, 하는 소리가 났다. 어깨가 들썩거렸고 윗배가 흔들렸다. 허헛, 웃기다, 참 웃긴 이야기야, 그런 웃기는 이야기를 여태껏 지껄이고 있었던 거야, 웃긴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면서, 이제, 그만하고 싶다, 그런 웃긴 이야기, 뭐랄까, 지겹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윤팀장이었다. 지소는 심호홉을 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주임, 왜 이렇게 통화가 안돼? 팀장이 주임에게 보고받으러 이렇게 여러 번 전화해야 되겠어?”

“바빴습니다.”

“마무리는 되었겠지? 최종보고서 때문에 본부장님 난리야.”

“마무리는 되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경계조정 불가능, 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뭐? 조정 불가능? 왜 그렇게 된 거야?”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제 오늘 연락이 안되더니 도대체 일을 왜 그따위로 하는 거야? 열심히만 하지 말랬지, 성과를 내야 한다고, 성과를.”

“열심히도 하고 성과도 낸 겁니다.”

“조정이 안되었다며 그게 무슨 성과야? 조정을 못한 거야, 안한 거야? 남의 일 떠맡았다고 지금 반항하는 거야, 뭐야?”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토지소유주들이 현재의 상태를 원하고 저 또한 경계를 조정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방금 전에요.”

“공백이 크다고 했잖아.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드린 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런 사안을 왜 보고하지 않는 거야. 이주임 단독으로 그렇게 판단하고 일을 처리하는 건 곤란하지. 회사에는 위계라는 게 있고 이주임 상사는 나야.”

“바빴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할 수 없지. 데이터라도 넘겨. 최종보고서는 써야할 거 아냐. 이주임 건만 남았다고.”

“그럴 수 없어요. 노트북이 바다에 빠졌거든요.”

“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럼 외장하드는? 데이터 저장 안해놨어?”

당연히 저장해놨습니다. 이지소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도 내니까요. 노트북의 데이터는 그날그날 모두 외장하드에 소중히 담아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신에게 주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 따위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박주임 그 자식이 아니라 나 이지소를 여기로 보냈을 때 그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성과를 내야 한다 어쩌구 하면서 박주임 그 자식만 끼고 돌 때 내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했어야지.

“이주임, 왜 대답을 안 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술 먹었어?”

“아뇨. 뭘 하자는 게 아니라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유능한 상사이니까 박주임과 알아서 처리하시죠. 저는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 그리고요. 공백 말입니다. 공백은, 그렇게 쉽게 메꾸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공백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아니, 공백을 그 누구도 가져서는 안된다. 공백 안에 어떤 시간이 흐르는지,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공백을 메꾸면 안된다. 공백은 지켜져야 한다. 소중하게 지켜져야 하니까 지킬 거다.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지소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주임, 이주임!”

“다시는 통화할 일 없었으면 합니다.”

지소는 전화를 끊었다. 냉장고에서 강강술래 달 밝은 물병을 꺼내 컵에 한가득 따랐다. 벌컥 한 모금 들이켰다. 웃긴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는 것도 괜찮다, 라고 생각했다.      


                                                                                    *     


딕딕, 디딕, 디디디딕. 

지소는 다시 소리를 좇아가기 시작했다. 휴게방이었다. 방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서늘하고 수상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풍경사진이었다. 얕아지려는 호흡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일단 숨을 쉬자, 들이쉬고 멈추었다가 내쉬고. 지소는 손을 들어 평화로워 보이는 그것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벌어져 있는 검은 입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축축한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는 또렷해지고 빨라지고 있었다. 동굴로 들어섰다. 촛불을 들고 나아갔다. 흙바닥의 자갈에 발에 치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동굴 벽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살피면서 한 걸음씩 발을 뗐다. 저쪽 입구에서 걸어 들어간 것보다 훨씬 긴 길이었다. 동굴이 막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벽을 마주했을 때 아까처럼 갑작스럽지 않았다. 벽을 향해 촛불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보았다. 동굴 속 아이. 

아이가 있었다. 지소는 놀라지 않고 다만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너였구나, 네가 내게로 오고 있었다. 

흰 옷을 입은 단발머리 아이는 막혀있는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이는 무릎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딕딕, 디디딕, 딕, 딕, 하는 소리는 아이가 무릎 위의 물건을 손가락으로 움직일 때 나는 게 분명했다. 그 물건은 가로가 넓은 직사각형의 나무판 위에 완두콩만한 작은 알들이 줄에 따라 수십 개 정렬되어 있는 것이었다. 저것은 주판이다, 가게의 금고 속에 있던 주판이다, 라고 생각할 때 아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십사 더하기 육십 칠 빼기 구, 칠백육십일 빼기 오십구 곱하기 십삼, 이천사백오십구 더하기 팔백삼십오… 아이는 쉴 새 없이 입으로 숫자를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주판알을 위로 아래로 옮겨놓으며 바삐 움직였다. 디딕, 딕딕, 디디디딕, 디딕, 딕, 사십팔 더하기 이십육, 사백이십삼 빼기 이백육십팔, 오백사십육 곱하기 이십오…

지소는 꼼짝하지 않고 아이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주판알을 옮겨놓는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가락은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처럼 가볍고 날렵했으며 아이의 손가락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주판알은 소금쟁이가 밟고 간 자리처럼 경쾌하게 흔들렸다가 흔적 없이 말끔해졌다. 하나의 셈이 끝나고 다음의 셈을 시작할 때면 아이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주판 틀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르르르 훑으면서, 셈의 결과로 얻은 숫자를 나타내고 있었을 주판알을 가지런히 정리하곤 했다. 그럴 때 아이의 살짝 벌어진 입과 빨갛게 달아오른 볼은 방금 끝낸 셈이 맞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아이는 한 번도 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지소는 촛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앉아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수십 번 수백 번 숫자를 말하고 주판알을 굴리고 다시 주판알을 가지런히 하면서,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었다. 몇 사람이 앉으면 꽉차버리는 좁디좁은 동굴 안에서, 세상의 전부인 양 소중하게 주판을 안고, 세상을 구하는 문제인양 자기에게 주어진 셈을 하는 작은 어깨… 동굴의 석간수가 지소의 마음으로 흘러내렸다.

그때 아이의 손가락에서 주판알 하나가 튕겨져 나와 또르르 굴러왔다. 작고 둥굴둥굴한 알은 지소의 발밑에서 멈추었다. 지소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들었다. 주판알처럼 생긴 작은 돌멩이였다. 돌멩이를 집어드는 순간 아이의 모습 위로 나는 셈 하는 게 좋다, 셈을 잘한다, 라는 노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지소는 은복사에서 주웠던 주판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손바닥 위 두 개의 주판알은 똑같은 모양과 크기였으며 똑같이 윤이 났고 반들거렸다. 

돌연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고만례야, 고만례야. 이리 가면 어찌 하라고. 목소리는 흐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물인 양 동굴 천정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렸다. 셈 잘하는 우리 고만례야. 백단위도 천단위도 척척하던 내 아우 고만례야. 꿈에라도 얼굴 한번 보여주지, 어찌 그리 무정할 수가. 동굴 전체가 몸부림치고 있었고 시공간이 신음하듯 뒤틀렸다. 지소는 지금 이 풍경이 누군가의 꿈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고만례를 애타게 부르는 가만례의 꿈. 동굴 벽만큼이나 주름진 노인의 마음속에 새겨진 풍경들이 지소에게 흘러들어왔다. 동굴만큼 오래되고 동굴 벽의 주름만큼 심산한 풍경이었다.     

대회가 열리는 전날 밤이었다. 군수가 주최하는 주산경진대회. 학교에서는 이미 주산으로 고만례를 따라올 친구가 없었고, 인근 읍내에서도 주산 잘하기로 소문이 나있어 이번 대회에서 일등까지 할 수 있겠다 욕심이 났다. 고만례는 어려서부터 그 신기한 물건에 혹했다. 아홉 살 때, 읍내에서 처음으로 전문학교 학생을 배출한 큰당숙네에 갔다가 영광의 주인공인 그 집 아들이 여동생을 위해 선물로 사주었다는 물건을 보게 되었다. 빨래판 같기도 하고 장난감 같기도 한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보고 읍내 최초의 전문학교 학생은 숫자를 나타내고 셈까지 하는 계산기라고 일러주었다. 나무로 만든 조그맣고 납작한 알은 반들반들했고, 양 끝 부분은 날이 선 것처럼 뾰족해서 손가락 끝에 잘 걸렸다. 그 작은 알들을 올리고 내리면 이십팔 더하기 오십사 따위의 문제를, 공책에 풀거나 암산으로 하지 않아도 척척 계산할 수 있었다. 여기부터 차례대로 일, 십, 백, 천 단위야, 윗줄에 있는 한 알은 다섯 개로 치는 거고 아랫줄 다섯 알은 한 개로 치고, 그러니까, 이렇게 윗줄 한 알을 올리고 아랫줄을 두 개 올리면 오십이가 되는 거야, 그리고 더할 때는 이렇게, 곱할 때는 이렇게… 계산법을 알려주는 친지의 말을 아이는 단번에 이해했다. 원래 셈하는 것을 좋아했던 데다가 그 앙증맞은 주판알들을 움직여 답을 얻어내는 게 신기한 마술처럼 느껴졌다. 고만례는 그 물건이 갖고 싶었고 그 물건으로 셈을 하고 싶었다. 제 손으로 주판알을 움직일 때면 나는 딕딕, 디디딕, 딕, 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늦은 저녁 밭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손등이 부르터있는 것을 보며 아이가 말했다. 주판을 잘하면 상급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 하고 주판만 잘하면 돈 버는 건 예사라 하니, 어머니, 제게 주판을 사주세요, 돈 많이 벌어드릴게요… 세 끼 밥 먹는 것도 시원찮은 집이었으니 어머니는 아이에게 당장 주판을 사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에 있다 없다 했고, 있을 때도 없었으면 하는 인간이었다. 쌍둥이 언니는 열 살이 넘자 아버지가 장영감에게 팔아넘겼다. 고만례가 조를 데는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손등이 부르터 피딱지가 들러붙었고 멀리까지 날일을 가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얼굴이 초췌해져 나이의 두 배는 들어 보인다 싶을 때, 어머니가 육백 원을 내놓았다. 주판을 사거라. 아이는 당장 읍내로 나가 잡화점에 들러 주판을 샀다. 삼십 원을 거슬러 받았고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점방으로 가서 우유를 샀다. 아이가 주판을 안고 있어 우유갑을 제대로 뜯지 못하자 점방 주인이 입구를 뜯고 빨대까지 꽂아주었다. 고소하고 맛난 우유를 빨아 마시면서 나무냄새 그윽한 오동통한 주판알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결심했다. 동네 하나뿐인 점방을 사드릴 것이다, 날일 나가지 않고 밥 굶지 않고 그렇게 살게 해드릴 것이다. 눈만 뜨면 주판을 놓았다. 문제 내줄 이가 없었으므로 스스로 문제를 내고 셈을 했다. 십 단위 백 단위가 우스웠고 천 단위 만 단위도 척척이었다. 그리고 대회가 다가왔다. 일등을 하면 상급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고 우등생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그 밤에 아버지가 집에 왔다. 불콰한 술기운과 욕지기도 함께 왔다. 아버지는 주판을 놓고 있던 고만례에게서 주판을 빼앗고 욕을 했다. 네년이 공부해서 뭐 하냐, 주판 살 돈은 어디서 났냐, 어미년이랑 어린 년이 나 몰래 무슨 작당이냐. 아이는 주판이 망가질세라 아버지에게 빌고 빌었다. 아버지가 주판을 마당에 내던졌다. 다행히 주판은 고사리를 말려놓은 멍석 위로 떨어져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틀이 조금 깨졌고 알 한개가 빠져나와 또르르 굴러가버렸다. 아이는 알을 찾을 틈도 없이 주판을 집어들고 집을 빠져나와 동굴로 갔다. 누군가 동굴에서 기도를 하다 갔는지 촛불이 켜져 있었고 떡과 나물이 고수레처럼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고만례는 촛불에 주판을 비춰보았다. 주판 한 알이 휑하니 빠져버린 자리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제 인생의 구멍인 것처럼 불길했다. 고만례는 동굴 바닥을 뒤져 주판알만한 크기의 작고 동글동글한 돌을 찾아 주판 위에 올려 두었다. 주판알처럼 쉽게 올리고 내리기 힘들었지만 할 수 없었다. 셈을 하기 시작했다. 사십 더하기 육십칠 빼기 구, 칠백육십 더하기 오십구 더하기 십, 이천사백오십 빼기 팔백삼십… 그렇게 동굴 속에서 주판을 놓으며 하얗게 밤을 샜다. 아침이 밝았다. 집에 들렀다가는 아버지한테 붙잡힐 것 같았다. 작은 다람쥐처럼 동굴을 빠져나와 점방을 지나치는 순간, 골목길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기어이 아이의 손에서 주판을 빼앗아 전봇대에 집어던졌다. 주판 틀이 부서졌다. 오동통한 알이 내리막길로 도르르 굴러갔다. 주판알을 주으러 달려간 고만례를 아버지는 기어이 붙잡아 몽둥이질을 했다. 네 년이 공부해서 써먹을 데가 어디 있다고, 밖으로 싸다니면 네 언니년처럼 팔아버릴 줄 알아. 

나는 셈하는 게 좋다, 셈을 잘한다. 아이가 중얼거렸다. 그래, 셈을 잘한다, 셈하는 걸 좋아한다, 지소가 따라했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부시게 하얀 머리의 늙고 주름진 얼굴이 지소를 바라보며 백발보다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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