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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사흘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김을숙 씨가 심고 간 매화나무에서 꽃이 피더니 열매가 맺었다. 지소는 매실이 연두에서 노랑으로 영글기를 기다렸다가 술을 담갔다. 별로 어려울 건 없었다. 매실을 잘 씻어 물기를 뺀 후 술독에 넣고 소주를 부어놓으면 되었다. 농도가 맞을까 걱정하지는 않았고 대충 눈짐작으로 했지만 어쩐지 아주 괜찮은 술이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게가 한가하거나 양옥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지소는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쓰다 보니 동화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고 만담 같기도 해서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그런 글이 되고 있었지만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소는 그래야할 것 같아서 김을숙 씨의 방으로 옮겨 생활했고 그가 남기고 간 트레이닝 바지와 패딩 점퍼를 입었다. 이어도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묵을 곳을 찾는 사람에게 아주 가끔 이층의 방을 내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왔다. 세상의 끝자락으로 떠밀려온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열흘 치 방값을 주었다. 여자가 온지 일주일째 되던 날 지소는 왠지 그러고 싶어서 창고 방의 유채꽃밭 사진을 들어 올리고 동굴로 들어갔다. 축축한 냉기는 여전했지만 오히려 안온함을 느꼈다. 흔들리는 촛불에 기대어 발걸음을 옮겼다. 꽤 걸었는데도 막힌 벽이 나타나지 않았다. 묘하다, 싶은 마음으로 계속 걸었고 갑자기 훵, 하니 동굴이 뚫려 있었다. 어느새 동굴 밖으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풀무더기 무성한 공터, 바로 동굴의 반대편 입구였다. 동굴은 뚫려 있었고 아이는 없었다. 주판을 만지는 소리도, 백발도, 눈부신 미소도 모두 사라졌다.  

지소는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가게에서 보면 복잡한 길이 미로처럼 보였지만 막상 걸어보니 미로라기보다 답을 알고 있는 수수께끼처럼 결국은 보통의 길이었다. 집들의 담벼락 사이를 걷고 있는 지소의 귀에 생활의 소리들이 흘러들어왔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지 배우들의 울고 웃는 소리가 들렸고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도 들렸다. 담벼락 앞 평상에서 담배 피우는 한 남자가 있었다. 현준 씨가 지소를 보고 어? 아…… 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담배 끊었잖아요.”

“끊었죠. 방구석에 이게 굴러다녀서 얼른 피워 없애버리려고요.”

“말이 되요?”

두 사람은 웃었다.

“지소 씨, 사진 한 장 찍게요.”

“제 사진 몇 컷 찍었잖아요.”

“이렇게 가게를 떠날 때의 사진도 있어야지요.”

“어떻게 알았어요?”

“저 인물 사진 전문가예요. 사람의 표정을 읽는다구요.”

“제가 어떤대요?”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의, 뭐랄까, 비장하면서도 가볍다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얼굴 가득.”

“그럼 여기 처음 왔을 때는요?”

“땅이 어떻고 보상이 어떻고 할 때요?”

“그랬죠. 제가 그 일을 하러 이곳에 왔었죠. 기억력 좋네요.”

“허, 그때는 억울해 미치겠는 얼굴이었거든요.”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현준 씨는 집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 밑 평상에 앉아 지소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 앞에 열린 미지의 길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게 보는 사람들 중 지소 씨가 최고였어요.”

“김을숙 씨에게도 그렇게 말했지요? 배춘영 씨에게도?”

“어떻게 알았어요?”

“그 정도는 알죠, 가게 보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진짜예요, 지소 씨 오기 전에는 을숙 아주머니가 최고였는데 지금은 지소 씨가 최고라고요. 어딜 가나 그건 기억하고 삽시다. 곧 볼 거니까 사진은 그때 줄게요.”

“고마웠어요, 현준 씨.”

“과거형으로는 말하지 말구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지소는 현준 씨와 헤어지고 서랑마을을 느릿하게 한바퀴 걸었다. 가게로 돌아와 비타오백 두 박스를 챙겼다. 목양교회에서 나지막하게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자가 양을 지킬 때 천사들은 노래하네. 교회는 인기척이 없었다. 사무실 책상 위의 포스트잇을 한 장 뜯어 메모를 했다. 

그동안 사용했던 화장실 물값입니다. 

추신 : 교회에 후원하는 물품을 고만례상회에서 사도록 신도들을 독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추신 : 제 연락처입니다. 복순에게 전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그분 안에서 평안하시길. 가게 보는 사람 드림.      

지소는 가게로 돌아왔다. 고만례상회를 지키는 사람으로 마지막 일을 하기 시작했다. 헐거워진 선반의 물건을 채워 넣고 음료수와 생수를 냉장고에 정리하고 박스를 쟁여놓았다. 아이스크림과 과자, 유제품류의 결제금액을 계산하고 현금을 다발로 만들어 금고에 넣었다. 머그컵을 깨끗이 씻어 개수대에 엎어두었고 전기포트도 알맞은 자리에 두었다.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고만례상회는 지소가 처음 발을 들여놓던 그 순간 그대로, 물건들의 완벽한 소우주가 되었다. 지소는 고대 유적지를 들여다보듯 선반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물건들을 눈으로 훑었다. 안성탕면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이 멈추었고 오늘 다 팔리지 않은 콩나물과 두부가 있는 냉장고 앞에서도 그랬다. 유리창 너머 늠름한 느티나무를 보면서 붙박이, 라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지소의 눈길은 오랫동안 쪽방의 패브릭 소파에 머물렀다. 새하얀 머리와 굽은 등, 빨대로 우유를 빨아먹던 꼿꼿한 입술, 딸각거리던 다리… 

고만례상회는 물건들의 소우주였고 사람들의 작은 우주였다. 그리고 지소는 그 우주의 일원으로 삶의 어느 시간을 살았다. 가게 보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 조금 더 아래로 뿌리를 뻗어보았고 조금 더 위로 가지를 들어올려 보았다. 뿌리 끝의 생장점으로 물과 양분을 조금씩 빨아들였다. 늠름하고 아름다운 저 느티나무만큼은 아니어도 이것이 내 몸통이다, 이것이 나의 손이고 다리이다, 나는 여기 있다, 라고 조금은 단단한 목소리로 말할 정도는 되었다. 고만례상회를 보는 사람은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 

가만례와 고만례, 현준 씨, 에효노인, 복순과 어머니, 전도사, 동네 사람들에게 지소는 고만례상회를 보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소는 서랑마을의 단 하나뿐인 가게를 보는 사람이었고 가게 보는 마음으로 가게를 떠나게 된 사람이었다. 꼭 지소가 아니어도 되는 자리를 이어받아,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떠나는 것이다. 

가게의 불을 끄고 가게의 문을 잠갔다. 느티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오랜 비늘처럼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사이로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조금은 너를 닮아가게 되었어, 고마워. 힘겹게 이곳을 찾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고만례상회의 간판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고만례였고 한때는 고마례였다가 다시 고마려가 되어서는 결국 고만례가 된, 어설픈 듯 고집스럽고 무감한 듯 집요한 작은 우주. 가게를 보기 전날 밤 생각했던 것처럼 고만례상회는 명백하고 질서정연하기만 한 세계인 건 아니었다. 물건과 물건값은 명백했지만, 명백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물건이 필요한 이유, 몰라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연, 살짝 으깨진 두부를 백 원이나 깎아줘야 하는지의 여부, 유효기간이 지난 요구르트를 공짜로 줬다가 배탈이 났을 때의 책임, 저녁이면 가게의 종이박스를 주워가는 노인이 한 시간 먼저 온 사람에게 폐지를 줬다고 윽박지를 때의 대처… 그리고 동굴노인이 마셨으나 누구한테 물건값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미결제로 남게 된 천오백 원. 그런 건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린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공백이 있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소중하게 지켜져야 하는 커다란 공백. 공백은 시간이고 꿈이고 진실이고 이야기이고 삶이다. 우주란 원래 그런 것이다, 라고 지소는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안녕,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게 그렇게 안녕. 좀 더 근사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떠오르지 않아 지소는 다만 이렇게 중얼거렸다. 영원히 기억할게, 나의 작은 우주.

용희 씨의 물고기 같은 눈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메모를 남겼다. 용희 씨, 저는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해요. 그 길에서 힘들 때면 용희 씨가 생각날 거예요. 그럴 때 카누 태워줄 거죠?

지소는 이층 양옥으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랑마을에 올 때 배낭에 짊어지고 왔던 모든 것은 없었다. 배춘영 씨가 준 에코백 하나가 남았다. 가게를 보면서 모아둔 얼마간의 돈도 넣었다. 이어도식당 노인이 그러라고 했다. 그래도 되나요, 라고 묻는 지소에게 노인이 말했다. 고만례가 그러라면 그러는 거야, 왜, 적어? 짐 꾸리기를 끝내고 읍내 묘목가게에서 매화나무를 한그루 사 가지고 돌아왔다. 큰 유리잔에 매실주를 가득 따라 두 번 나눠 마신 뒤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슥, 삭, 몇 번의 삽질로 방금 심은 묘목의 아랫부분을 두툼하게 만들고서 광, 광, 삽등으로 토닥거린 뒤 허리를 펴고 있을 때 저녁 산책을 마친 여자가 대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만례상회, 사흘만 봐주시면.” 

하겠다 못하겠다 말은 하지 않고서 열쇠를 받아든 여자가 물었다. 

“왜 저인 거죠?”

“당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다만 이곳으로 당신이 왔을 뿐이지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자가 지소가 들고 있는 가방을 바라보았다. 와. 글자 하나가 여자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지소는 대문을 향해 걷다가 다시 몸을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목도한 사람처럼 애매모호한 눈으로 지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저 매화나무는 내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겁니다, 지금은 연약하기만 하지요, 그렇지만 꽃은 필 겁니다, 그 정도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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