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따윈 두렵지 않다네!
어? 이상하다. 작년엔 이렇지 않았는데… 보통 11월 중순쯤부터 선선해지는 아부다비. 올해는 왠지 선선하다기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7~8월 한여름 사막 한가운데는 거의 50도에 육박하는데 이 때는 습도까지 더해져 바깥활동이 거의 불가하다고 보면 된다.
지금 아부다비에서 가장 지내기 좋다는 계절이 찾아왔지만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는 날씨에 날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은 점점 추워지고 있다고 했다. 김장을 한다는 지인들의 이야기에 겨울이 왔구나 싶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기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봄과 가을은 스치듯 지나가고 뜨겁거나 추운 두 계절만이 남았다. 아주 극단적으로 춥거나 더운 날들이 이어지는 순간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이번 겨울은 얼마나 추울까. 한국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떠오른다. 특히 시골에 있는 사람들이…
두 아이는 감기에 걸렸다. 코를 훌쩍이는 아이들을 보며 더운 나라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 말로만 겨울이지 추위 없는 조금 쌀쌀한 겨울이 왔구나 싶었다.
눈사람이 만들고 싶다던 두 아이. 지난 주말엔 스티로폼 가루 같은 것으로 눈세상을 연출해 놓은 공간에 갔었다. 아이들은 가짜 눈인 줄 알면서도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며 온몸으로 스티로폼 눈을 맞고, 흰색 작은 공들을 던지며 눈싸움하는 시늉을 했다. 더운 나라에서 하는 눈싸움이라니 그것도 에어컨을 아주 빵빵하게 틀어놓고 인공의 추위를 느끼며 가짜 눈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씁쓸해졌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어젯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틀어달라고 했다. 오래전 큰 아이가 무척 좋아했던 겨울왕국. 주인공 엘사 흉내를 내며 마법으로 우리 집을 겨울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어린 은서가 떠오른다. 눈사람 친구 올라프도 기억난다. 여름날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던 올라프는 자신의 몸이 녹는 줄도 모른 채 벽난로 가까이에서 친구를 간호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겨울왕국을 보다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집은 시골의 작은 집이었는데 내 방문은 창호지를 바른 문, 둥그런 문고리가 있었다. 보일러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안방에는 불을 때었고 거기에서 가끔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다. 불을 땐 방은 훈기가 있었다. 그래도 제대로 난방이 되지 않던 우리 집은 늘 추웠다. 늘 양말을 껴신고 외투를 입은 채 이불을 코끝까지 덮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찬물로 머리를 감고 나가면 머리는 고드름처럼 얼어 손으로 부러뜨리는 재미가 있었다. 가끔 눈이 내리는 날에는 동생과 마당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변변한 장갑 하나 없어 엄마의 고무장갑을 빌려 쓰기도 했다. 그 시절엔 눈이 자주 내리기도 했고 계절의 변화도 뚜렷했다.
꽁꽁 언 호숫가에서 동네 친구들과 모여 썰매를 끌어주며 놀았다. 어찌나 추웠던지 호숫가 얼음은 겨울 내내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수가 조금씩 녹는 날이 왔을 때 봄이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중학교 시절, 겨울 아침이면 교복만 걸치고 한 시간여 걸어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학교도 춥기는 마찬가지여서 얼었다 녹았다 하던 발은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학교로 걸어가며 성냥팔이 소녀처럼 ‘내 주변에 따뜻한 난로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하며 주문을 걸듯 따뜻한 기운에 감싸인 몸을 상상하기도 했다. 추위에 단련된 나는 병치레 한 번 없이 튼튼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겨울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되고 시골집에서 벗어나 도시의 따뜻한 집에서 추위를 모르고 살았다. 겨울은 있었지만 추위는 내가 마음먹으면 피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20대, 좌충우돌 30대를 보내는 중에도 추위는 찾아왔는데 그것은 감각으로써의 추위가 아닌 정서적 추위의 상태였다. 자주 마음이 추웠고 움츠러들고 불안하고 초조했다. 마음을 데워줄 것 같은 다양한 외부의 자극들을 추구하며, 그것이 주는 온기에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40대가 된 지금도 가끔 마음이 꽁꽁 얼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다. 동상 걸린 발을 움켜쥐고 어찌할 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얼어버리고 굳어버린 마음을 붙들고 씨름하던…40대의 나. 최근까지도 마음의 고통을 부둥켜안고 슬픔의 한가운데 머물렀었다. 겨울은,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고통의 근원을 마주하며 더 큰 고통으로 빠져 허우적 댔지만 바닥을 박차고 다시 위로 오르는 일마저도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한 책을 만났다. 헤르만 헤세의 책 <삶을 견디는 기쁨>을 읽으며 고통을 곱씹어 보았다. 정신질환을 앓으며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사는 삶을 이야기한 헤세. 그는 고통을 피하거나 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닌, 온몸으로 껴안아 마주하라고 이야기한다. 고통은 고통으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거기에 온전히 몰입해 받아들여보는 경험, 그 경험 중에 발견되는 고통의 ‘달콤함’을 맛보라고 한다. 고통은 기쁨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을 몸소 체험해 보라고 한다. 그럴 때라야만 새로운 나, 깨어있는 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어린 시절 겨울 추위가 내 신체를 단련시켜 주었듯이 말이다.
겨울을 보내는 생명들을 떠올렸다.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고, 식물들은 겨울철 뿌리를 더 튼튼히 하는데 집중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마음의 겨울, 그 순간을 대비하려면 매일의 평화가 쌓이고 쌓인 그 상태.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상태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늘 온기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오늘 내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낮에는 몸을 움직이고 해가지면 잠이 들 준비를 하듯이, 눈을 감고 조용히 머물러 내면을 데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기도와 영성의 시대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국 사회의 꽁꽁 언 얼음을 녹이는 중이다. 그러나 겨울은 또 찾아올 것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우리는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올 그 겨울의 시간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바깥으로 향하는 외침을 나에게 돌려보는 것이다. 이 겨울을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으로 삼으면 좋겠다.
며칠 뒤 나는 어느 추운 나라에 간다. 스스로 겨울로 들어 가는 것이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피할 수 있는 추위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나는 또 어떤 기쁨을 발견하게 될까?
어린 은유가 치맛자락 휘날리며, 마술봉 휘두르며 겨울왕국 주인공이 되어 부르던 노래가 떠오른다. 노래의 마지막 가사를 외치며 비장하게 엄마를 보던.
“추위 따윈 두렵지 않다네!”
노랫말 참 멋지다! 우리 손잡고 겨울로 성큼성큼 걸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