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사람처럼,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고 음악을 하는 이하루 감독이 며칠 집에 머물렀다.
(수많은 수식어가 있겠지만 나는 그를 감독으로 부르고 싶다.)
그는 오랜 시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동물 착취의 현장들을 영상에 담아 세상에 내보인 영화감독이자 <사회적응 거부선언>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게는 그저 길가는 손님으로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 이집트에 있다던 그는 며칠 아부다비에 묵어갈 수 있냐고 물어왔고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 온라인상으로 인사하며 이야기 나눈 사이다. 실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본래 사람을 가려 사귀는 편이 아닌데 그래서 그를 조금은 더 편안한 맘으로 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아부다비 공항으로 마중을 갔다. 밀짚모자에 겨울 스웨터, 슬리퍼를 신은채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서 있던 사람. 한눈에 봐도 이하루 감독이었다.
어색함과 설렘이 섞인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하루 감독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고민했다. "뭐라고 부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모나 언니라고만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아이는 그에게 “하루야!”하고 외쳤다. 그는 “응?”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 반가운 아이들은 질문들을 던져댔다. 나이가 몇 살이냐, 몇 개국 여행을 했느냐, 기억에 남는 나라가 있느냐.. 등 아이들 눈에 하루 감독은 그저 여행자처럼 보였나 보다. 씨끌벅적 이어지던 대화는 잠들 시간이 돼서야 끝이 났다. 나는 큰아이 방을 잘 정돈해 이부자리를 준비해두고 머무는 동안 편히 계시라고 했다.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고, 나는 그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먹고 싶은 음식, 가고 싶은 곳 등...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낫또가 먹고 싶다고 했다. 마침 집에 낫또가 있었다. 알리오올리오를 해줄까 했던 나는 따끈한 현미밥과 김치, 낫또를 식사로 드렸다. 그는 유럽에서 낫또를 맛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모스크에 가고 싶다는 그와 함께 그랜드 모스크에 갔다. 나도 한 번밖에 가보지 않은 장소, 딱히 또 가리라 생각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모스크에 들어서며 으리으리한 규모에 한번 놀라고 모스크를 빠져나오면서는 영적인 기운은 1도 느끼지 못했다며 놀랍다 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초호화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대규모 모스크가 부끄럽기만 했다. 아부다비에 사는 죄로... 그 순간 나는 오로빌의 마트리만디르를 떠올렸다. 아이들이 '황금알'이라고 불렀던 그 마트리만디르, 아침이면 그곳에 가서 발자국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머물러 명상에 잠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로빌리언들의 땀과 수고로 지어진 그곳. 그에 반해 아부다비의 그랜드 모스크는 건물을 짓는데 애썼을 노동자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로사했을까 하며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하루감독. 건물에 영적인 기운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짓는 사람 따로, 누리는 사람 따로, 이제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부자나라 아부다비 사람들은 모스크에서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한다는데... 무엇을 위한 기도를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침 일찍 함께 차를 마시고, 아침 식사로 누룽지와 김치를 먹었다. 저녁에는 해변가를 걸었다. 나는 수많은 타이틀을 가진 그를 그저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였을까 밥을 먹을 때도 함께 걸을 때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정적의 순간이 편안하기만 했다. 애씀 없는 관계란 이런 것인가 했다. 처음 본 사람,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으로 상대를 대할 때 그저 한 존재로만 바라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는 오랜 기간 허리가 아파왔다고 했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하다가 아로마세러피 마사지를 해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여러 도구들을 꺼내어 바닥에 엎드려진 그의 몸을 마사지했다. 허리에 집중하기보다 몸 전체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목에도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목 안의 염증 반응과 목 뒤 미세하게 만져지는 작은 혹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허리와 목이 나빠진 시기를 이야기하며 그 시절 마음이 아팠던 순간을 내게 슬며시 이야기했다. 향과 마사지로 몸을 풀고 나란히 앉아 오다카 요가동작 중 척추 움직임 동작을 함께 했다. 다음날이면 인도로 떠난다는 그에게 마음을 다해 선물을 한 기분, 마사지를 해주고 나니 내 몸도 상쾌해졌다.
그는 전문 타투이스트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타투로 생계를 이어갔다고도 했다. 떠나기 전날 그는 내 양쪽 손목에 조그만 문양을 새겨주었다.
왼쪽에는 삼각형모양을, 오른쪽에는 빛의 모양을 남겼다. 의미 없이 새긴 타투에 의미를 줄까? 했더니 삼각형은 'Body-mind-soul'로 하면 좋겠다 했다. 나는 삼위일체를 떠올렸는데 말이다. 의미는 새기기 나름이니까... 한쪽 손목에는 ‘빛’... 그건 내가 한동안 여행 다니며 본 것이었다. 왼쪽엔 명상적 타투, 오른쪽엔 삶의 방향을 새긴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밤바다를 거닐었다. 아침에 해가 밝아오면 그 바다를 또 함께 걸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떠날 날이 다가오자 더 편안해진 우리는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조금씩 더 늘어놓게 되었다. 12.3 내란이 있었지만 그 주제가 우리의 대화에 끼지는 못했다. 그는 그저 세 가지에 저항한다고 했다. 국가와 가족체제, 그리고 학교. 이 폭력적인 시스템에 저항한다고 했다. 나는 학교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여하며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본능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많은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소수지만 혼자라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 목 차크라 이슈가 생기는 이유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첫날 구멍 난 바지를 입고 왔던 그는 머무는 동안 내가 빌려준 옷을 입고 지내다가 마지막 날에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떠났다. 빨래를 마친 잘 마른 그의 옷가지들을 개키면서, 구멍 나서 천을 덧댄 트렁크 팬티를 발견했다. 남자들이 입는 그 트렁크 팬티. 성별도 잊은 사람 같았다. 무엇에도 메이지 않는 사람. 나이도 세지 않는다는 그 사람. 곳곳을 떠돌며 그 어떤 계획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이, 누구든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세계곳곳에서 만난 폭력적인 장면들을 눈에만 담지 않고 영화로, 음악으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작은 체구의 아나키스트를 만났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처럼 그를 대했다. 그리고 헤어질 무렵 우리 집 둘째가 “하루야 우리 또 언제 만나?.” 하고 묻자 잠시 머뭇대던 그는 “또 만나자.”하고 미소 띠며 대답했다.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배낭을 동여 메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언제나 어디서나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또 만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