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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ul 16. 2021

고구마 도둑질

1. 고구마 도둑질    


  “야, 저기 주인 온다~”

  온몸에 전기가 찌르르 흐르더니 곧 오줌 질일 것 같다. 내 얼굴은 흙빛으로 바뀌고 심장은 벌떡거렸다. 몸은 감전된 듯 뻣뻣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낙담했다. 아아 이제 사람들이 나를 도둑년이라고 하겠구나. 인사 잘하고 착한 척하더니 실은 남의 밭 고구마나 훔치는 도둑년! 그 생각을 하니 후회가 가슴을 쳤다. 내가 왜 자진해서 고구마 캐러 간다고 했던고. 다시는 다시는...... 내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우리가 집에서 2km쯤 떨어진 성굴앗 밭에 모여 검질(김)을 매던 날이었다. 그러다 출출해지자 언니 중 누군가가 앞 밭에서 고구마나 캐다가 구워 먹으면 맛있겠다고 했다. 앞 밭은 우리 밭보다 아래로 푹 들어가 있었다. 그 밭 앞은 작은 도로였으니 실상은 우리 밭이 높다란 지역에 있는 셈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살살 부는 바람에 고구마 이파리들이 싱싱하게 찰랑거리며 넓은 밭 가득 햇빛을 되 쏟고 있다. 가슴은 콩닥대었지만 나는 호기롭게 돌담을 타고 내려갔다. 언니들의 이쁨을 받을 생각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고구마를 캐러 나섰다. 설핏 후회되는 심정도 눌러 제쳤다. 그래도 혹시나 주변에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니 빨리 일을 끝내야 한다. 


  호미로 고구마 이파리들을 들어 올렸다. 어떤 데 여문 게 있을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으니, 일단 부드득 고구마 줄기를 들어 올리고 본다. 아직은 앳된 얼굴처럼 작게 여문 고구마 중에서 굵은 것을 골라 땄다. 그 근처를 뒤져 치마 가득히 따서 옷으로 감아쥔 채 우리 밭을 향하여 걸어갔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병사마냥,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던 순간이었다.  

  

  그때 언니들이 소리를 친 것이다. 아뿔싸, 밭 주인이 오면 돌담을 다 오르기 전에 나를 볼 텐데 이를 어쩌나! 담을 붙잡아 올라가다 보면 몸이 더 잘 보일 테고 그냥 밭에 있어도 잡힐 테니 큰일 났구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이해득실이 계산되었다. 나는 꼼짝없이 잡힐 것이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래서 ‘얼음 땡’한 상태로 우리 밭을 향하여 언니들을 바라보고 그냥 서 있었던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지도 못한 채로.    


  다행히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떻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인이 온다고 했는데. 도망갈 방법이 없던 나는 분명히 잡혔을 텐데.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언니들이 나를 놀리느라 거짓말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


  나는 고구마를 하나씩 우리 밭으로 집어 던진 후에 어찌어찌 담을 기어 올라갔다. 밭 주인이 온다는 소리를 들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고구마를 어디서 누가 구웠는지, 언니들과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까만 껍데기에서 노란 속살이 예쁘게 드러난 고구마를 받아들고서도 슬픈 건지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잠겨있었다. 


  고구마를 씹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확 달아오른 수치심만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잉걸불처럼 타고 있었다.     



2. 솔 가지 도둑질


  그날은 요셉 오빠가 동생인 젬마와 함께 새로 산 톱을 자랑스레 들고 나타났다. 사라 언니는 오빠의 톱을 보자 흔쾌히 같이 땔감을 하러 가자고 나섰다. 나도 젬마와 친하게 지냈기에 기분 좋게 따라갔다.


  때는 늦은 오후라 우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야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다. 나와 젬마는 솔잎 긁을 갈쿠리를 무장하고 돌아다녔고 사라 언니와 요셉 오빠는 말라버린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 소나무밭을 돌고 돌아도 이미 누가 긁어 갔는지 솔잎은 별로 없었다. 언니와 오빠도 죽어버린 잔가지 몇 개를 잘라냈을 뿐이었다. 


  소나무마다 나무 끝 가지에만 솔방울이 달랑 몇 개씩 매달려 있다. 이런 솔방울을 따는 건 다람쥐 같은 내 몫이다. 나는 나무 위까지 재빠르게 올라가 작대기를 쳐서 솔방울을 다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면 언니는 그것을 주워 담았다.


  한 시간을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우리가 얻은 것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오빠의 손에서 빛이 나는 단단한 새 톱날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죽은 나무 둥치는커녕 죽은 가지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해질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언니와 오빠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소나무밭에서 작은 생가지를 꺾기 시작했다. 어떻게 의기투합이 됐는지 오빠가 톱으로 나뭇가지를 쳐 내면 언니는 그것을 오빠네 마대 자루와 우리 마대 자루에 담아 넣었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쳐 내어도 되나?’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언니 오빠가 하는 일이라 바라만 보았다. 큰 소나무밭이라, 그 안에서 돌아다니며 잔가지를 치니 금새 마대가 가득 찼다. 얼른 일이 끝났다.


  흐뭇한 마음으로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우왕 거리며 달려왔다. 

  “너네, 거기 서보라.”

  아저씨였다. 

  “너네, 남의 밭에서 생가지 자르믄 되나? 너네 부모안티 말해사켜. 이거 뭐냐 이거...”

    (남의 밭에서 생솔가지 자르면 되니? 너의 부모에게 말해야겠다.)

  아저씨는 마대 자루에서 생솔가지를 들춰내어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언니와 오빠는 싹싹 빌었다. 아저씨는 그 후에도 한참 설교를 하더니 우리가 그날 돌아다니며 얻은 것까지 자루째 모조리 갖고 사라져버렸다. 언니와 오빠는 그쯤에서 끝나는 게 다행이다 싶은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러나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나는 어두워가는 시야 속에서 길에 깔린 돌부리를 걷어차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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