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찬희는 매정하게 뿌리 칠 수는 없었다. 결국 잠시 김소장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찬희 씨를 보니까 진우 생각도 나더군요. 그래서 술 좀 마셨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그리고 그 냄새와 함께 '진우'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찬희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우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더니, 술기운에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찬희 씨, 사실 처음 뵀을 때부터... 찬희 씨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찬희는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아예 못 들은 척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찬희 씨 옆에는 진우가 있어서 제가 감히 다가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진우가 가고 난 뒤... 음... 찬희 씨 생각이 계속 났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역시 우리는 인연인가 봅니다..."
진우의 죽음과 실직으로 삶의 기반이 무너졌던 찬희는 '우리는 인연'이라는 그의 말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 말이 진심일까 하는 생각마저도 스쳤다. 하지만 곧 그의 옷에 베인 담배 냄새가 찬희의 이성을 일깨웠다.
'아버지도 그 여자에게 이렇게 다가간 걸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바람기와 김 소장의 추파가 겹쳐지며 찬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농담인지 술주정인지도 모를 그의 말로 인해 서서히 짜증과 불쾌감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진우가 떠난 이후로 마음속에 항상 남아 있던 게 있습니다. 찬희 씨에게 이 이야기를 꼭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이끌림에 찬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찬희의 떨리는 목소리에 김소장은 잠시 시선을 피하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복무 시절 힘들어하던 진우에게 제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다른 방법으로 도움이 되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솔직히, 제 잘못입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인 척 살아가려 했지만, 일이 그렇게 되어버려 저도 가슴이 무너집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찬희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 때문이야. 오빠가 군 생활 중에 담배를 시작했던 것도 저 사람 때문이잖아. 그때 담배만 피우지 않았어도, 암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곧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런데 그것 때문일까? 오빠가 암에 걸린 게 정말 저 사람 탓이기만 할까? 아...'
그렇다고 해도 그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논리도, 어떤 사실도 찬희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이 상처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찬희는 그의 이야기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지만 김소장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책감을 털어놓았다.
"매일 후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찬희 씨에 대한 저의 감정도, 진우의 짧은 생도 제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찬희 씨를 뵐 용기가 없었는데... 오늘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어쩌면 제 사과를 전하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찬희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저렇게 말한다고 해서 오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찬희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서,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저도 남편이 떠난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얘길 지금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단호한 찬희의 말에 김 소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달라질 건 없겠죠. 하지만 찬희 씨에게만큼은 저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구애인지 단순한 사과인지 알 수 없는 '저의 진심'이라는 그 말이 그녀를 더욱 무너지게 만들었다.
찬희는 자신을 더 이상 하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사람들의 노리갯감이 된 거지? 내가 그렇게도 나약한 인간인가?'
이런 생각에 찬희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높은 굽이 휘청이면서 몸이 앞으로 쏠렸고, 한껏 손질해 놓은 머리마저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런 찬희를 김소장이 재빠르게 부축했다. 순간적으로 불안해진 찬희는 이성을 되찾고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호하게 말을 마친 찬희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김소장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찬희는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차 안의 차가운 공기와 적막함에 그녀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깜빡이는 신호등 불빛이 흐릿해지며,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지만,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여전히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