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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6화] 얼어붙지 않는 열매

by U찬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찬희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가 쉽지 않았다. 집에도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감기 기운 때문에 병원을 다녀와야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침 오늘은 1월 1일이라 병원이 쉬는 날이었다. 그렇다면 병원뿐만 아니라 은영언니네 부동산도 쉴 게 뻔했다. 아무리 매장이 정리된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날짜 가는 것도 모르고 어젯밤 보람과 약속을 한 것인지, 그런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그렇다지만, 함께 약속을 잡은 보람도 어지간한 듯했다.

'보람이도 회사 잘리고 나니 이래저래 참 정신이 없었나 보네.'

찬희는 혹시나 해서 은영에게 오늘 영업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역시나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답을 받은 찬희는 보람에게 내일 함께 보러 가지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는 오늘 집에서 쉬고 있을 선희와 엄마에게 서후를 맡긴 체 다시 침대에 누워 숙취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그렇게 새해 첫날을 아무 의미 없이 보낸 찬희는, 하루 종일 잔 덕분에 다음날만큼은 개운하게 눈을 뜰 수 있었다.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온 뒤, 보람과의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자 찬희는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아침에 병원을 다녀올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동네 병원을 갈 때야 잘 보일 사람이 없어서, 아무 옷이나 걸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가더라도 전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은영 언니를 볼 생각을 하니 그럴 수는 없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은영에게 백수가 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찬희는 거울을 보며 한껏 단장했다.
서후가 아기 일 때는 번거로워서 기르지 못했던 머리카락도 이제는 이미 길게 늘어 뜨러 져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최대한 예쁘게 손질했다. 원래 하얀 얼굴이지만 더 화사하게 보일 수 있도록 밝은 컬러로 곱게 화장을 했다. 겨울이지만 어두운 컬러가 아닌 밝은 색상의 원피스를 입고 거울에 앞과 뒷모습을 번갈아 비춰본 찬희는 엄마에게 서후를 부탁하고는 집을 나섰다.



은영이 남편과 함께 개업한 부동산은 신화동 4,000세대 아파트 상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단지 아파트이니만큼 상가도 전면에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은영의 부동산은 아파트 입구에서도 제일 가까운 곳이라서 손님들의 눈에도 제일 잘 띌 것만 같았다.

'자리도 참 잘 잡으셨네.'


부동산 사무실 앞에서 보람이 오기를 기다리던 찬희는, 은영부부가 이곳에 사무실을 개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았을지 안 봐도 그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좋은 위치에 감탄하고 있던 사이 보람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찬희에게로 다가왔다.

"언니, 추운데 많이 기다렸죠?"

찬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냐, 아냐. 나도 방금 왔는데 뭘.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자."

두 사람은 최고 부동산이라고 적혀 있는 사무실로 나란히 들어갔다. 안에서는 은영이 찬희와 보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와,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

"언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그래, 너희도 잘 지냈지?"

"네, 언니. 근데 사무실이 정말 예쁘네요."

위치에 감탄하던 찬희는 안에 들어와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은영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긴 멋스러운 인테리어와 조명들이 사무실을 더욱 빛나게 해서, 마치 분위기 좋은 카페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한껏 멋을 부리고 왔다고 생각했던 찬희는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자신감이 확 사라져서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심적으로 주눅이 든 찬희와는 달리, 손질이 잘된 화분들을 바라보던 보람은 화분 옆에 놓여 있는 은영의 명함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 여기 이름이 최고 부동산이네요? 이 동네에서 최고로 잘 나가려고 지으신 거죠? 헤헤"

보람의 귀여운 웃음을 바라보며 은영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 그런 의미도 있고. 최승기, 고은영, 우리 두 사람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이기도 해."

역시나 금실 좋은 부부다운 이름이었다. 사무실 간판에까지 이렇게 두 사람의 애정이 느껴질 줄이야. 두 사람이 서로를 빛내 주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부럽다 못해 시샘이 느껴질 정도였던 찬희는 화제를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언니, 참 하린이는 학교 어떻게 됐어요?"

​"아, 합격했어. 3월에 입학할 거야."


"어머나, 잘 됐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 하린이한테 찬희이모가 축하하더라고 전해 줄게."

"지난번에 저희 학교 지원할 거란 얘기 들었는데, 거기 된 거예요?"

"맞아. 너희 학교 연극영화과."

"우와, 대단한데요. 연기할 생각을 다하고."

"지가 좋아서 한다는데, 뭘 선택하든 지 인생이라 생각해서 나도 별 말은 안 해. 알아서 잘하겠지."

은영의 딸이 자신의 모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찬희는 진우와 함께 거닐던 캠퍼스가 떠올랐다. 학교 정문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연극영화과 건물이 있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곳을 지나치며 찬희는 진우에게 말했었다.

"오빠, 난 끼 있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더라. 타고난 재능을 그런 곳에 발산할 수 있잖아."

찬희의 말에 진우가 대답했다.

"우리도 아직 몰라서 그렇지, 잘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그런 타고난 끼라는 게. 그것도 연습하면 늘 수도 있을 거고."

그런 진우를 보며 찬희가 말했다.


"에이. 난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거 전혀 없어."

그 때나 지금이나 찬희는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부럽게만 느껴졌다.

은영의 딸인 하린에게도 그런 재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찰나, 은영이 말했다.

"서후도 그동안 많이 컸지?"

"네, 작년까지 어린이집에도 거의 띄엄띄엄 보냈는데, 올해부터는 유치원에 보내려고요. 이제 다 컸죠, 뭐."

"그래, 애들은 정말 금방금방 커. 우리는 그만큼 나이를 먹어가는 거고."

은영의 말에 찬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휴, 언니. 아직 한 10년은 젊어 보이는 분이 왜 그러실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은영의 남편 승기가 외근을 갔다 와서는 따뜻한 차를 준비해 주었다.

"부점장님, 아니 소장님 잘 마실게요."


보람이 예전 같았으면 어려워서 말도 못 붙였을 승기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보람 씨. 추우니까 이거 마시고 몸 좀 녹이고 집 구경하러 가요. 세대가 많아서 매물 나온 것도 많으니까."

승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가던 네 사람은 집을 보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집을 구경하는 사이, 은영 부부는 이미 베테랑이 된 듯이 능숙하게 아파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새 아파트라 집 구조도 좋고 아파트 내 커뮤니티에 있는 헬스장이며 실내 수영장과 같은 시설도 고급스러워, 보람은 굉장히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친절하고 상세한 최고 부동산 부부의 안내에, 보람은 최고 부동산과 꼭 거래를 하겠다고 했고, 이사를 생각하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도 최고부동산에 함께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넓은 아파트 단지 안 여기저기를 다 구경하다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은영은 먼 곳까지 찾아와 줬으니, 고마움의 의미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은영은 승기에게도 물었다.


​"자기도 같이 갈 거지?"

승기도 흔쾌히 동의했고, 은영은 얼마 전 아파트 주변에 새로 오픈한 패밀리레스토랑에 함께 가자며 길을 나섰다.

"그 집 스파게티랑 피자가 꽤 맛있더라. 간단하게 맥주 한잔 해도 좋고."

그러면서 은영은 골목 안으로 세 사람을 데리고 갔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입구에 있는 작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추운 날씨임에도 나뭇가지에서는 작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었다.

열매를 자세히 보기 위해 일행들과 약간 뒤처진 찬희는, 모든 것이 얼어붙어 차가운 기온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력에 마음이 떨려왔다.

'작고 연약해 보여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구나.'

잔잔한 감탄을 내뱉은 찬희는 서둘러 앞선 세 사람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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