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북적이는 술집 안으로 들어가며 직원이 안내해 주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막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술집 안은 활기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으면서 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사회적 거리 두기도 해제돼서 여기에는 꽤 사람들이 많네요."
보람이 찬희의 말에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그러게요. 우리 회사는 왜 이런 곳처럼 회복이 쉽지 않았을까요? 그럼 우리도 폐점 기념으로 여기서 술 마실 일은 없었을 텐데..."
바깥 날씨는 싸늘했지만, 세 사람은 차가운 생맥주 3잔을 시키고는 얼른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직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고, 배의 허기뿐만 아니라 마음의 허기가 진 세 사람은,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살얼음이 동동 뜬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
찬희는 서후를 낳은 이후 수유를 하면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서후가 좀 크고도 퇴근하기 바쁘게 집에 가서 서후를 씻기고 재우느라, 또 새벽 출근까지 준비하랴 피곤해서 술을 거의 안 마시다 보니 억지로 찾아서 마실 일도 없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느는 게 술이라니, 한 번 안 마시기 시작하니까 그만큼 주량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내일부터는 백수의 몸이 될 것이고 새벽 출근할 일도 없다. 차도 가지고는 왔지만, 대리운전을 맡기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찬희의 정신은 완전 봉인 해제되는 기분이었다.
한 모금에 500CC 맥주의 반 이상을 들이켠 찬희가 조용해진 분위기를 깨뜨리며 말했다.
"다들 앞으로 뭐 하고 살 거예요?"
찬희의 질문에 지윤이 먼저 답했다.
"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아웃렛이 이번에 크게 리뉴얼할 거라는 소문이 있어서 거기나 알아볼까 해. 분명히 직원들을 추가로 모집할 거고."
그러자 보람이 자기도 같이 알아보자고 말하면서 지윤의 팔짱을 꼈다.
보람은 턱으로 찬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니는 이제 뭐 할 거예요?"
보람의 질문에 찬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일자리가 당장 구해지는 게 아니라면 일단은 실업급여받으면서 못 읽었던 책이나 좀 읽을 까 싶어. 그래도 나름 국문과 출신인데 책 한 권 다 읽어본 지가 언제였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나."
찬희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는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 보는 게 오래전부터의 막연한 소망이기는 해.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어? 안 그래요? 매니저님."
찬희의 힘 빠진 목소리에 지윤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제 매니저도 아닌데, 그냥 언니라고 해. 우와! 그리고 소망 멋진데? 찬희 너라면 꼭 될 거라고 내가 장담해. 하하."
하지만 찬희는 이제 월급도 없는 빈털터리가 글만 쓴다는 게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순간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그 소망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원했던 것이었는지 조차 이제 기억이 안 난다는 생각이 자신을 더욱 기운 빠지게 했다. 간절하게 소망을 원했던 옛날과는 달리, 한없이 나약하진 지금의 자신을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워진 마음에, 취기가 오르면서 눈물도 함께 솟아났다.
그런 찬희의 슬픈 눈빛을 눈치챘는지, 보람이 씩씩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저는요. 처음엔 회사에서 잘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너무 겁이 났었거든요. 이 직장 놓치면 큰 일 난다 싶어서요. 그때는 안 뺏기기 위해서 꽉 쥐고 있으려니까 너무 힘들고 괴로웠는데, 이제 손을 놓아 버리니까 이렇게나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표정을 한 보람이 계속 말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정한 건 없는데요, 지금 사는 집 계약이 다 돼 가서 일단 집이나 좀 보러 다녀 볼까 싶어요. 뭐 큰돈은 아니지만 퇴직금 받은 거 보태서 새 집으로 이사 가려고요."
보람의 밝은 웃음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찬희는, 아직도 내려놓을 없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을 훔치며 보람에게 말했다.
"어디로 알아볼 거야?"
"신화동에 4,000세대가 입주한다는 아파트 구경이나 한 번 가 볼까 싶어요."
신화동이라는 말에 찬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신화동이라면 은영 언니가 남편이랑 부동산 개업한 곳이잖아. 언니네 부동산에 한 번 물어봐."
"전 은영 언니랑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요. 그럼 찬희 언니, 시간 되면 저랑 같이 가 보실래요?"
"그러자. 이제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데 뭘. 언제든지 콜."
"아, 그럼 내일 바로 가볼까요?"
"그래, 그럼 내일 같이 가보자. 근데 나 약간 감기 끼가 있어서 오전에 병원에 좀 갔다 올까 하는데, 오후에 가도 괜찮겠어?"
"전 상관없어요, 언니. 그럼 내일 오후 3시에 아파트 앞에서 만나서 은영 언니 부동산에 같이 가요."
찬희와 보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지윤이 말했다.
"그나저나 은영언니랑 오승기 부점장님은 정말 대단해. 어떻게 회사 그만둔 지 2달도 안 돼서 부동산 차릴 생각을 했대? 추진력 진짜 최고인데?"
"그러게요. 아무리 회사 그만두기 전부터 배웠다고는 하지만, 퇴사하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가게 연 사람들도 처음이에요. 그것도 부부가 함께 말이에요."
찬희는 은영부부가 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예전부터 항상 부러웠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도 여전히 금실 좋게도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진우의 모습이 떠올라 또 한 번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오늘은 보람의 말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술에나 취하고 싶었다.
다들 회사에서 잘린 몸이었지만,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기대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술기운에 얼굴도 발갛게 상기된 찬희가 보람을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 가게 분위기 좋은데? 어두운데 그냥 따라 들어온다고 가게 이름도 안 보고 들어왔네. 여기 이름이 뭐야?"
"그렇죠? 여기 분위기 괜찮죠? 그래서 제가 여기로 모시고 왔죠. 가게 이름이 '괌'이래요."
보람의 뒤로 보이는 어두운 가게 벽에는 'GUAM'이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밝은 불빛을 바라보자 찬희는 문득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언제나 따뜻하고 푸른 바다가 있는 저곳과는 달리, 자신은 이 추운 겨울 속에 홀로 서 있다는 생각에 저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쯤이면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비록 지금은 차가운 겨울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따뜻한 순간이 올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한 찬희는 다시 한번 맥주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