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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찬스 Nov 23. 2024

[소설 25화] 겨울 속 푸른 GUAM


세 사람은 북적이는 술집 안으로 들어가며 직원이 안내해 주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막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술집 안은 활기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으면서 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사회적 거리 두기도 해제돼서 여기에는 꽤 사람들이 많네요."


보람이 찬희의 말에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그러게요. 우리 회사는 왜 이런 곳처럼 회복이 쉽지 않았을까요? 그럼 우리도 폐점 기념으로 여기서 술 마실 일은 없었을 텐데..."


바깥 날씨는 싸늘했지만, 세 사람은 차가운 생맥주 3잔을 시키고는 얼른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직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고, 배의 허기뿐만 아니라 마음의 허기가 진 세 사람은,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살얼음이 동동 뜬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


찬희는 서후를 낳은 이후 수유를 하면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서후가 좀 크고도 퇴근하기 바쁘게 집에 가서 서후를 씻기고 재우느라, 또 새벽 출근까지 준비하랴 피곤해서 술을 거의 안 마시다 보니 억지로 찾아서 마실 일도 없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느는 게 술이라니, 한 번 안 마시기 시작하니까 그만큼 주량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내일부터는 백수의 몸이 될 것이고 새벽 출근할 일도 없다. 차도 가지고는 왔지만, 대리운전을 맡기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찬희의 정신은 완전 봉인 해제되는 기분이었다.


​한 모금에 500CC ​맥주의 반 이상을 들이켠 찬희가 조용해진 분위기를 깨뜨리며 말했다.


"다들 앞으로 뭐 하고 살 거예요?"


​찬희의 질문에 지윤이 먼저 답했다.

"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아웃렛이 이번에 크게 리뉴얼할 거라는 소문이 있어서 거기나 알아볼까 해. 분명히 직원들을 추가로 모집할 거고."

​그러자 보람이 자기도 같이 알아보자고 말하면서 지윤의 팔짱을 꼈다.

보람은 턱으로 찬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니는 이제 뭐 할 거예요?"

보람의 질문에 찬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일자리가 당장 구해지는 게 아니라면 일단은 실업급여받으면서 못 읽었던 책이나 좀 읽을 까 싶어. 그래도 나름 국문과 출신인데 책 한 권 다 읽어본 지가 언제였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나."

찬희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는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 보는 게 오래전부터의 막연한 소망이기는 해.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어? 안 그래요? 매니저님."

찬희의 힘 빠진 목소리에 지윤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제 매니저도 아닌데, 그냥 언니라고 해. 우와! 그리고 소망 멋진데? 찬희 너라면 꼭 될 거라고 내가 장담해. 하하."

하지만 찬희는 이제 월급도 없는 빈털터리가 글만 쓴다는 게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순간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그 소망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원했던 것이었는지 조차 이제 기억이 안 난다는 생각이 자신을 더욱 기운 빠지게 했다. 간절하게 소망을 원했던 옛날과는 달리, 한없이 나약하진 지금의 자신을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워진 마음에, 취기가 오르면서 눈물도 함께 솟아났다.

​그런 찬희의 슬픈 눈빛을 눈치챘는지, 보람이 씩씩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저는요. 처음엔 회사에서 잘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너무 겁이 났었거든요. 이 직장 놓치면 큰 일 난다 싶어서요. 그때는 안 뺏기기 위해서 꽉 쥐고 있으려니까 너무 힘들고 괴로웠는데, 이제 손을 놓아 버리니까 이렇게나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표정을 한 보람이 계속 말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정한 건 없는데요, 지금 사는 집 계약이 다 돼 가서 일단 집이나 좀 보러 다녀 볼까 싶어요. 뭐 큰돈은 아니지만 퇴직금 받은 거 보태서 새 집으로 이사 가려고요."

​보람의 밝은 웃음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찬희는, 아직도 내려놓을 없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을 훔치며 보람에게 말했다.

"어디로 알아볼 거야?"

"신화동에 4,000세대가 입주한다는 아파트 구경이나 한 번 가 볼까 싶어요."

​신화동이라는 말에 찬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신화동이라면 은영 언니가 남편이랑 부동산 개업한 곳이잖아. 언니네 부동산에 한 번 물어봐."

"전 은영 언니랑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요. 그럼 찬희 언니, 시간 되면 저랑 같이 가 보실래요?"

"그러자. 이제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데 뭘. 언제든지 콜."

"아, 그럼 내일 바로 가볼까요?"

"그래, 그럼 내일 같이 가보자. 근데 나 약간 감기 끼가 있어서 오전에 병원에 좀 갔다 올까 하는데, 오후에 가도 괜찮겠어?"

"전 상관없어요, 언니. 그럼 내일 오후 3시에 아파트 앞에서 만나서 은영 언니 부동산에 같이 가요."

​찬희와 보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지윤이 말했다.


"그나저나 은영언니랑 오승기 부점장님은 정말 대단해. 어떻게 회사 그만둔 지 2달도 안 돼서 부동산 차릴 생각을 했대? 추진력 진짜 최고인데?"

"그러게요. 아무리 회사 그만두기 전부터 배웠다고는 하지만, 퇴사하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가게 연 사람들도 처음이에요. 그것도 부부가 함께 말이에요."

찬희는 은영부부가 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예전부터 항상 부러웠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도 여전히 금실 좋게도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진우의 모습이 떠올라 또 한 번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오늘은 보람의 말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술에나 취하고 싶었다.

다들 회사에서 잘린 몸이었지만,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기대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술기운에 얼굴도 발갛게 상기된 찬희가 보람을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 가게 분위기 좋은데? 어두운데 그냥 따라 들어온다고 가게 이름도 안 보고 들어왔네. 여기 이름이 뭐야?"

"그렇죠? 여기 분위기 괜찮죠? 그래서 제가 여기로 모시고 왔죠. 가게 이름이 '괌'이래요."

보람의 뒤로 보이는 어두운 가게 벽에는 'GUAM'이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밝은 불빛을 바라보자 찬희는 문득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언제나 따뜻하고 푸른 바다가 있는 저곳과는 달리, 자신은 이 추운 겨울 속에 홀로 서 있다는 생각에 저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쯤이면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비록 지금은 차가운 겨울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따뜻한 순간이 올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한 찬희는 다시 한번 맥주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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