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차 안의 분위기도 바꾸고 잠도 깰 겸,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 DJ가 '아무도 잠들지 말라'라는 뜻인, '네순 도르마'라는 곡을 소개했다.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은 자신을 위한 곡인 것 같아, 찬희는 곡의 마지막 부분인 '빈체로! 빈체로!'가 울려 퍼지자, 스스로를 다잡으며 힘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승리하리라!'라는 가사가 지친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차를 몰던 찬희는, 다행히도 '5분 후 목적지 도착'이라는 안내 문구가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소장과의 일로 인해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고, 눈꺼풀이 무거워졌지만, 곧 집에 도착할 것이라는 생각에 힘을 냈다.
'서후는 잘 자고 있겠지?'
서후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의 위안이 된 찬희는 왕복 4차선 대로에서 좌회전을 하기 위해 신호를 받고 잠시 멈추어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좌회전 화살표 신호가 켜지자 찬희는 핸들을 돌렸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반대편 차선에서 대형 SUV 차량이 신호를 무시한 체 쏜살같이 달려왔다. SUV의 헤드라이트가 눈앞을 번쩍였다. 찬희는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이 차가 들이 받히는 충격에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쾅!"
금속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찬희의 연둣빛 경차는 땅에 떨어졌다. 몸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 에어백은 터졌지만, 찬희는 '서후야' 이 한마디만 외친 체 머리를 창문에 부딪히고 말았고 정신은 아득해져 갔다.
술에 취한 SUV 운전자는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찬희의 차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는 CCTV도, 사람도, 하물며 지나다니는 차조차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다시 자신의 차로 향했다.
"괜찮아. 아무도 본 사람 없을 거야."
혼자 중얼거리던 남자는 깊게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의 SUV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시동을 걸어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술냄새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찬희는 정신을 붙들어 보려 했지만, 조금 전 따라 불렀던 '빈체로!'라는 노랫소리만 귓가에 맴돌면서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 남은 것은 찢긴 차체와 길 위의 적막뿐이었다.
모든 것이 멀어져만 간다고 느껴진 순간, 먼지로 뒤덮인 잔해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희야..."
희미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윽고 찬희의 눈앞에는 뿌연 안개와 함께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저 비행기는..."
그랬다. 분명 진우가 암을 진단받기 전에 꿈에서 타고 떠났던 그 비행기였다. 비행기 안에서는 진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찬희를 향해 다가오는 진우의 후면에서는 아련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여... 여... 보..."
그렇게도 보고 싶고, 불러보고 싶은 남편이었건만, 찬희는 입이 제대로 떼지 질 않았다.
"찬희야, 나 비행기 자격증 땄어! 내가 이거 태워줄게."
진우는 늘 그렇듯 다정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비행기 조종석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아무리 봐도 찾는 것이 안 보이는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찬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찬희야, 비행기 키가 안 보이네. 안 되겠다. 다음에 데리러 올게."
그러면서 비행기는 뿌연 안개와 함께 또다시 사라졌다.
"여보, 가지 마."
찬희는 남편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진우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뛰어가 보려고도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리에서 발이 떼지지 않았고,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찬희의 눈앞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사고가 나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현장을 지나가려다 엉망이 된 도로를 목격했다. 이윽고 승용차 운전자는 도로 구석진 곳에 찌그러져 있는 경차 한 대를 발견했고, 서둘러 차에서 내려 경차를 향해 달려갔다.
뒤집힌 차 안에는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여자가 정신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승용차 운전자는 혼자 힘으로는 여자를 빼내기 힘들 것 같아,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숫자 키패드의 버튼을 급히 눌렀다.
"119"
전화가 연결되자 남자는 다급하게 사고 위치와 다친 사람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119 상황실 직원은 마지막으로 신고한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
"저는 이석훈이라고 합니다."
승용차의 주인은 바로 석훈이었다. 찬희의 첫사랑이자 대학 선배 이석훈.
석훈은 전화를 끊고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큰 소리로 차 안의 여자를 깨워 보았다.
"저기요, 정신 차려 보세요."
석훈의 외침에 여자는 잠깐 정신이 드는지 실눈을 뜨고는 석훈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세요. 혹시 이름 뭔지 기억나세요?"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하나하나 자신의 이름을 발음했다.
"윤... 찬... 희"
겨우 이름 석자를 말한 여자는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찬희의 이름을 들은 석훈은 숨을 멈춘 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피에 얼룩진 얼굴은 믿기 힘들었지만, 확실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