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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09. 2022

첫사랑

  내 첫사랑이자 첫 남자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화제의 인물들을 초대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그저 그런 프로그램. 거의 십여 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들이 동시에 밀려와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어떤 기억을 먼저 떠올리면 좋을까?

처음 만날 날? 고백? 함께 보낸 수많은 밤들?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이별?

세월이 흘러 나이가 제법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서 보이는 그의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는 여전했다. 배우들처럼 아주 잘생기거나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포근하면서 믿음을 주는 인상. 그리고 듣는 사람을 살짝 들뜨게 만드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주변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그렇게 홀린 듯 그에게 빠져들었다.     


  당시에 그와 나는 가수 지망생 신분이었다.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던 나와 다르게 그는 아직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우리는 고민보다는 도전과 사랑에 더 목말라있었고,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격히 가까워졌다. 깊이와 속도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부둥켜안은 채 빨려 들어갔다. 5년 가까이 사귀는 동안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예쁜 포장지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그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멈췄지만 나를 제외한 세상은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계속 돌았고, 어지러움에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은 나의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으며, 그 피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 마냥 내 혈관들을 갈가리 찢으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처절하게 망가졌다. 살기 위해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를 잊어야 했다.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내가 쌓아온 것들을 깡그리 포기했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운명은 여전히 나와 그를 잡아끌고 있었다.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그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마 다시 마주하자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그렇다. 아직 제대로 끊어내거나 풀지 않은 실타래가 비밀스럽게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다.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다.    


  언행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공인이 하는 언행 그리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언행은 파급력이 상당하다. 작용과 반작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내가 던진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 나는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났으며, 작은 직장의 힘없는 구성원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아마 나와 헤어지고 나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이 여의치 않자 방황을 시작했고, 큰 사고(비밀이니 묻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짐작이 간다.)까지 치자 참지 못한 부모님이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단다. 대신 자식과 부모 간의 연을 끊는 대가로 받은 목돈으로 식당을 열었고,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자 그의 외모와 언변에 반한 투자자들이 곳곳에서 몰려들었고 했다. 지금은 전 세계 대도시에 수십 개의 프랜차이즈 식당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했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최근 유명 여배우의 열애설이 돌고 있는데 그 상대방이 바로 본인이란다. 공개적으로 처음 밝히는 것이라며 결혼 날짜도 잡았다고 했다. 나도 그 배우를 알고 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에다가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에 팬으로서 그녀를 좋아한다.     


  그와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 한 장 한 장 추억을 더듬어 본다. 

나는 고통, 행복, 부끄럼, 좌절, 기대, 환희, 절망 이 모든 것들이 담긴 사진들을 무척 소중하게 간직하는 편이다. 좋든 싫든 사진에 담긴 그 순간만큼은 거짓이 섞이지 않은 솔직한 나였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특히 정체성이 분명해진 이후부터 더욱 세심하게 기록과 함께 사진들을 보관해 왔다. 그와의 5년이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겨있다. 우리 둘이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는 마치 세찬 소나기가 물러나자 온 세상을 다시 말갛게 비추는 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빠진다.


  망각을 뚫고 아픔이 용솟음쳤다.

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나를 무참히 짓밟았다. 바로 어제까지 한여름이었던 계절이 하루아침에 매서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로 바뀌었다.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싱그러운 과일들은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고, 나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보라에 파묻혀 꽁꽁 얼어붙어갔다.     


  내 목적은 단순하다. 

그의 멋진 미소가 사라지고,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비통하게 바뀌고, 그가 이룬 것들이 깡그리 무너지고, 지금 그가 이루고자 하는 사랑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임이 만천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 그가 나에게 했듯이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그 이상으로    


  그는 내가 제보한 사진들과 인터뷰 내용으로 인해 전래 없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동성애자임에도 여성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플라토닉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여론은 하나같이 여배우를 동정하며 그를 매장하고 있다. 여배우 역시 사기꾼인 그와 즉시 파혼을 할 것이며,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는 글을 SNS 상에 올렸다. 소송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내비쳤다. 소문인지 진실인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이야기도 돌아다녔다. 그가 벌이던 사업이 파산 직전이며 유명 여배우와의 결혼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는.     


  깊은 수렁에서 이제야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했던 그 사진을 이제는 태워버리기로 했다. 욕정이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를 갈망하는 내 사진과 그 뒤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아름다운 세레나데. 아깝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번 일로 나는 오랜 시간 벗어나 있었던 가수의 길에 다시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언론은 나를 이용했고, 나도 언론을 이용했다.



<작가의 꿈보다 해몽>

한 남자가 텔레비전에서 새로 사귄 여자 친구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전 부인이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해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요. 

지고지순했던 시간들이 끝나고 피치 못할 사정과 다양한 이유로 이별을 맞이하고 나면 상대방의 감정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사랑을 하는 동안 가장 아픈 순간은 언제일까요?

고통은 기억으로 남는 것 같은데, 사랑도 기억의 일부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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