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7시면 33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울리던 알람 소리. 허겁지겁 학교에 도착해 보면 교무실로 들어오는 여러 쌤들의 소리, 교무실 여기 저기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들, 복도를 가득 채우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곧 내 일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은퇴. 그 단어는 여전히 낯설다.
요즘 나를 가장 많이 사로잡는 질문 중 하나는 '어디서?'다. 인생 2.0을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학교라는 공간이 없어진 나의 삶은 어떤 곳에 뿌리내려야 할까?
"선생님, 은퇴하면 제주도로 가보세요! 바다 보면서 사시면 좋잖아요." "유럽 같은 데 가서 1년 정도 살아보는 건 어때요? 항상 가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냥 여기에 계세요. 여기도 뭐 다 있는데 뭐 하러 멀리 가요?"
교무실에서 어쩌다 한번씩 은퇴 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동료 교사들은 저마다의 제안을 내놓는다. 모두 좋은 제안이지만, 내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33년 교직 생활을 돌아보면, 내 삶은 늘 '관계'로 가득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나눠주는 시간들. 학생들, 학부모들,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는 내게 큰 보람이었지만, 동시에 지금은 번아웃은 아니지만 살짜쿵 고백하건대 때로는 소진되는 느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쫑아빠,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세요."
며칠 전 교무실 앞에서 만난 학생 한 명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래, 이제는 조금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과 마주하던 삶에서, 조금은 고요함이 있는 삶으로의 전환. 그것이 내 인생 2.0의 첫 번째 키워드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다 내려놓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 바로 쫑아들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연결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사랑의 GPS 기법'이다.
GPS가 3개 이상의 위성 신호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듯, 나도 쫑아들이 자리 잡은 지점을 기준으로 내 위치를 정하려 한다. 어설픈 문과답게 적당한(?) 이론과 실천을 접목한 내 나름의 방식이랄까.
"아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우리 사는 데 가까운 데로 오시면 되잖아요."
지난 주말 오랜만에 만난 쫑아들에게 이 이론을 설명했을 때의 반응이다. 아이들은 내 이론적 접근방식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내게는 사뭇 진지한 계획이다.
현재 큰아들은 장교로서 직업 군인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근무지를 기다리고 있고, 작은아들은 취업과 대학원 진학을 위해 서울 용산 근처에 자리 잡았다. 이 두 아들과 나의 세 지점을 연결하면 하나의 삼각형이 그려진다. 내 계획은 이 삼각형 꼭지점 어딘가, 아이들 각자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을 찾는 것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삼각형을 그리며 교집합을 찾는 나를 본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은 정말, 에이그!!! 그냥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되지."
하지만 내겐 이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 33년간 열심히 계획된 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아이들에게도 계획적 삶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교사의 습관이랄까. 문제를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
내 사랑의 GPS 분석 결과, 최적의 지점으로 대충 서너군데의 후보지를 물색중이다. 아직 쫑아들의 꼭지점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제 조금만 지나면 인생 2.0의 삼각 측량이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쫑아빠, 그럼 여기 떠나서 어디로 가실 건데요? 집은 어떻게 구하시려고요?" 은퇴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동료들은 아쉬워하며 질문의 꼬리표를 계속 남긴다.
다음 가족 모임에서도 나는 이 이야기를 계속 할 예정이다. 아마 아이들은 또 웃겠지만, 이것이 내가 33년 교직 생활에서 배운 것이다. 이론과 실천의 조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
인생 2.0에서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지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결은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사랑의 GPS' 원리다. 위성이 신호를 주고받듯, 우리도 때로는 만나고 때로는 떨어져 있되, 항상 서로의 위치를 아는 관계.
오늘도 나는 주말의 여유있는 시간을 빌려 지도 앱을 열고 후보지 몇 곳의 부동산 정보를 살펴본다. 즐겨보는 유튜브 임장 영상도 하릴없이 켜놓고 보기도 한다. 3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터전을 찾는 이 과정이 새로운 설렘으로 다가온다. 인생의 GPS가 '도착 예정'이라고 알려주는 그곳에서, 나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33년간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관계의 지혜'가 아닐까. 너무 가까우면 서로 부담스럽고, 너무 멀면 소원해지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과연 인생 2.0 최종 목적지가 어디일지 지금 현재로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아마도 알 수 있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