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가 내리는 청도 운문사로 향했다. 은퇴 준비를 시작한 이후, 한 달에 몇 번씩 찾게 된 이 길은 이제 내게 익숙한 여정이 되었다. 운동도 되고 머리도 식히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시간.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종교는 없는 나지만 암자를 찾는 이 모두에게 일용할 공양을 준비하는 봉사활동도 하고자 계획하고 있는 곳이다.
교단에서 33년, 수많은 아이들의 인생 나침반을 조율해주던 도덕 교사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동안은 미처 몰랐다. 그저 열심히 달려오기만 하다가 때로는 잠시 멈춤도 필요하다는 걸 최근에서야 나의 몸과 마음이 느끼기 시작했으니까.
사리암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낙엽 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건한 BGM처럼 흐른다. 비에 젖은 돌계단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올라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내 인생의 시간처럼.
작년 말이었나? 고등학교 친구들 계 모임에서 우연한 소식을 접했다.
"대법관 임명됐다며? 축하해야 할지, 위로해야 할지..."
"하필 시국이 이런 상황에서..."
모임에서 동창들이 나눈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돈다. 중고등학교 시절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 하나가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아주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중고등학교를 같이 보낸 친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저 친구때문에 나는 전교 1등도 한번도 하지 못하게 했던 나쁜 친구!!! 그러나 옆에서 보면 정말 우직하게 자신의 할 일만 했던 것으로 기억되던 친구였다.
모두가 축하해야 할 순간이지만, 현재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그의 임명은 양날의 검이 되었다. SNS에는 그를 향한 비난과 지지의 댓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저 오랜 친구일 뿐인데, 세상은 그를 정치적 스펙트럼 어딘가에 고정시키고 판단하려 한다.
계단을 절반쯤 올랐을 때, 숨이 가빠졌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본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넓게 펼쳐졌다. 마치 내 인생의 지난 시간을 조망하는 것 같다.
#교직33년. 그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랐을까? 첫 발령받던 날의 떨림, 처음 담임을 맡아 아이들 앞에 섰던 순간, 이제는 어느덧 나이든 선배 교사가 되어 더 큰 책임을 짊어졌던 시간들. 그 모든 계단들이 한칸 한칸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문득, 대법관이 된 친구와 나의 계단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위치만 놓고 보면 그는 분명 '더 높은' 계단에 올라있다. 하지만 오늘 SNS에서 본 그의 모습은, 그 높은 계단 위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우비를 꺼내 입으며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쫑아빠, 선생님은 왜 다른 일 안 하고 선생님 하셨어요? 다른 일을 하셨으면 교직보다는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었을 텐데..."
몇 년 전 고등학교 제자 졸업생 한 명이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는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라고 간단히 대답했지만, 지금 이 계단 위에서는 더 깊은 답을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 때의 나는 '더 높은' 계단을 오르는 대신, '더 의미 있는' 계단을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리암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삭히며 벤치에 앉아서 비오는 계곡과 운무가 하얗게 피어나는 장면들을 눈으로 돌아보며 생각한다. 은퇴 후 남은 시간이 20년, 혹은 30년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제 어떤 계단을 오를 것인가? 더 높은 곳? 더 편안한 곳? 아니면 내가 진정으로 가치를 느끼는 곳? 앞으로 나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인생의 선택지일 것이다.
대법관 친구의 SNS 댓글창을 보면서 느꼈던 그 묘한 감정이 다시 밀려온다. '성공'이라 불리는 그 높은 계단 위에서, 그는 과연 행복할까? 이제 내게 남은 인생의 계단은 얼마나 높아야 할까?
"선생님, 도덕 시간에 배웠던 '가치 있는 삶'이 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남들이 정해준 성공이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찾아가는 거죠?" 10년 전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던진 이 말이 지금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래, 내가 33년간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그 가치. 바로 그것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긴다. 은퇴 후의 계단은 남이 정한 높이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평온함을 느끼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대법관이든, 은퇴 교사든, 각자의 계단이 있고 각자의 의미가 있다.
사리암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이제 내 인생 2.0의 계단은 더 높이가 아닌, 더 깊이 향해 가야겠다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계단으로.
비가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어느새 얇은 햇살이 희미하게 걸려있었다. 마치 은퇴 후 내 삶의 새로운 장면들을 비춰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