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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Jan 18. 2024

대화

아내가 통장에 돈을 보냈다


          

아내가 퇴근했다. 잘 다진 소불고기에 당면을 불려서 함께 볶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쌀밥을 공기에 소담스럽게 담았다. 포기김치 밑둥치 내쳐 쪽쪽 찢어 넓은 쟁반에 먹음직하게 올리고, 흐르는 물에 파릇한 상추도 씻어 물기를 뺀 후 뱃살공주 치아를 닮은 하얀 접시에 소담스럽게 차려냈다. 참기름과 아몬드와 호두 가루가 들어간 쌈장도 빠트리지 않았다.      


아들도 뱃살공주도 말이 없다. 식탁에 세 명이 둘러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하였다. 게걸스럽다는 표현이 어쩜 맞을 수도 있겠다. 뱃살공주 음식 치대는 소리, 밥그릇 달그락 소리, 손바닥만 한 상추쌈을 싸서 볼이 터지도록 구겨 넣고 우걱우걱 씹어서 꾸역꾸역 삼키는 소리, 쪽쪽대며 남편 반주 넘기는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쌈에서 버티지 못하고 입가로 흐르는 국물만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편 뿌듯한 기운도 솟았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사나이가 상류 계급으로 공인을 받으려면 특별나게 잘 하는 요리 하나씩은 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물건도 잘 만들고, 쌈질도 잘하면서 지혜로운 오디세우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금 식탁에서는 별난 아들놈과 까탈스러운 뱃살공주께서 내가 만든 요리를 무언으로 그 맛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로써 일단은 상류사회 진입에 한발 다가서는 순간이라 자찬했다. 물론 지극히 나를 위한 정신 승리이자 상상력의 발로다.     


침묵은 금보다 무겁다.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침묵이다. 기술 공학이나 예술 등 창의적인 행위에는 시공과 침묵, 그리고 색과 리듬이라는 요소에 중점을 두어야 목적한 것을 이뤄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결국 개개인의 역사(미시사)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침묵을 즐기는 작금의 내가 그렇다. 금요일 지방정부가 주최한 수필 심사부터 그린피스 행사 참석이라는 소재를 창의적인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결말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할 것인가! 금보다 무거운 침묵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성격 재빠른 놈이 입을 열었다. 먼저 그리피스 행사 참석을 함께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의중을 파악해야 했다.




그린피스 부산행사 재활용 선물교환



“아들아, 이번 주 토요일에 그린피스 부산 행사 참석자 확정 났다고 연락이 왔는데 엄마 갈 수 있는지 물어봐.”

아들 눈치가 9단이다. 이미 집안의 냉랭한 분위기를 촉수와 피부로 감지한 터였다. 옆에 앉은 엄마를 돌아보지도 않고 밥그릇에 얼굴을 묻은 채 축약해 전한다.

“엄마, 그렇데.”


뱃살공주가 아각아각 김장김치 치대는 소리를 섞어 이런다.

“환경운동? 집안 환경이나 신경 쓸 것이지. 라고 전해라.”

졸지에 통역사가 된 아들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빠, 그렇데.”


밥을 다 먹고 난 후, 물로 양치하면서 동시에 입을 여는 신공을 선보이는 뱃살공주의 연이은 공격,

“아빠 집 언제 나가냐고 물어봐.”

“아빠, 들었지요?”


순간 내 얼굴이 카멜레온처럼 붉게 변했다. 기어이 원점으로 돌아가려나 보다 했지만, 쉬이 물러설 내가 아니다. 어떻게든 도돌이표를 찍어야 한다. 흥!!!

“다~ 때가 되면 나간다고 일러라.”

“엄마, 그렇데”


“빨리 나가달라고 전해.”

“아빠, 빨리 나가래. 큭큭큭!”


“올해는 바쁘니까 내년으로 미루고, 내년 초는 너무 추우니까 꽃피는 춘삼월이 좋겠다고 일러라.”

“엄마, 춘삼월이래.”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전해.”


뱃살공주 목소리 옥타브가 순식간에 몇 단계를 뛰어넘자 짜증과 질리도록 작금이 싫다는 뜻으로 전해왔다. 당연히 나도 싫다. 이땐 함께 목소리를 높이면 싸움이 일어난다. 회오리는 맞서선 안 된다. 일단은 피해야 한다. 그나마 마음이 백지장 두께만큼이라도 더 부드러운 내가 목소리를 안성기처럼 해서 이렇게 말했다.      


“배 째라고 전해.”


그러나 점차 검붉어지는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그동안 평안하게 지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인 채 목소리를 최대한 깔아서 덧붙였다.

“잘 들으라고 전해, 한 번만 더 언제 나가냐고 물으면, 나가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 것으로 알아듣겠다고 전해라.”


시간을 벌고 보자는 나의 순수한 반격이자, 내가 생각해도 멋진 멘트다. 이쯤이면 자연히 통역도 필요 없다.

“웃기지 말라고, 나갈 때까지 달달 볶을 거라고 전해.”


“볶이는 게 취미라고 전해라.”


이때 아들이 폭발했다.

“아 쫌, 밥 좀 먹자!!!”     


아들 승!

이로써 일단락됐다.  

그날 밤은 긴장 속 어둠의 평화가 지속되었고, 초긴장 상태의 정신은 깊은 잠에 들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뒤척뒤척 애먼 쿠션만 몸살 내고, 물마시고 화장실을 들락댔다. 냥이랑 놀다가 결국 새벽 두 시에 맥주 캔 하나를 목구멍으로 들이부은 후에야 어찌어찌해서 새벽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어수선 꿈자리 뒤에 일어나니 8시가 훌쩍 넘은 시간, 늦잠을 잔 터라 아침 운동을 빠트렸다. 지난밤 꿈에서 몽땅 털려버린 영혼을 되찾고자 침대에서 고양이 스트레칭을 한 후 일어나 침대 정리를 했다.  

    

커튼을 열었다. 오늘도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해가 건너편 아파트 건물 창문에 비춰 내방 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다. 창문도 열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친다. 밤새 볼일을 본 냥이 두 놈 이물질이 거슬린다. 화장실이 셋이나 있지만, 큰 것은 반드시 내방에서만 볼일을 보는 이놈들이 이젠 얄밉다.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기억하기 싫은 향기가 꿈자리조차 해괴망측하게 펼쳐지곤 한다. 시체가 썩어가는 곳을 가운데로 걸어가는 꿈도 꾸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워도 본능을 거역할 수 없는 여리고 여린 나다. 안방으로 들어갔다. 꽃 그림 이불에서 향기가 날 리 없지만, 밤새 토해낸 아내의 코골이와 거친 숨의 잔재가 남아 있는 듯하다. 침대 정리를 한다. 그리고 콩물에 두유를 섞어 아침을 대신하였다. 대충 씻고 버릇처럼 글쓰기, 작업실 띠동갑과 통화하며 새해 사업을 위한 작전 모의, 그리고 따뜻한 차를 우려내 잠시의 휴식을 취하였다. 톡도 확인하고, 브런치스토리 글벗 포스트도 읽고, 인터넷 카페도 들락댔다. 때때로 고개를 들어 거실 넓은 창을 통해 공원을 감상하며 계절이 오가고, 날씨의 변화를 확인하였다.     



 



배꼽시계가 속을 채우라며 울린다. 냉장고에 김밥 남은 재료를 모아 꼬마김밥을 말아 해결하였다. 역시 맛도 일품, 솜씨도 일품이다.  포만감에 잠이 쏟아진다. 20여 분 소파에 기대 눈을 붙였다. 창으로 사정없이 들이친 햇살이 유혹해 눈을 떴다. 지방지에 연재 중인 ‘맛보기 세계사’ 글쓰기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비타민 D도 섭취할 겸, 건강하게 살기 위해 오후 4시쯤 집을 나섰다. 공기가 맑다. 바람이 차다는 뜻이다. 강을 따라 두 시간 걸었다. 걷는 이의 마음에는 백만 가지 번뇌가 드라마로 펼쳐진다. 해피엔딩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늘은 더 어둡게 깔리고, 발걸음조차 흐릿흐릿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쯤 들어왔다. 대충 샤워 후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맛있는 주문을 걸었다. 설거지는 나가기 전에 온전히 끝낸 후다. 식기 건조대에 냄비와 그릇은 남은 물기 닦아 제자리를 찾아 정리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뱃살공주가 맛있게 먹을 저녁 메뉴를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멸치볶음, 계란지단, 연근조림, 깻잎장아찌, 김장아찌, 무말랭이 김치, 말린 가지조림 등 마른반찬이 많다. 문득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확인했다. 시래기 된장국이 바닥에 깔렸다. 건더기가 많아 그렇지 대충 2인분은 될 양이다. 냉장고에 보관한 다시 멸치 물을 붓고 두부를 송송 썰어 넣은 후 불을 켰다. 내 방에 들어와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뿔싸! 냄비!!!     


불은 꺼졌지만, 지독한 냄새를 동반한 연기가 거실 허공을 자욱하게 매웠다. 급하게 뚜껑을 열다가 손가락에 화상 물집이 생겼다. 아파할 겨를이 없다. 고무 손잡이를 이용해 냄비째 싱크대에 넣고 물을 붓자 더 지독한 향기와 수증기가 피어나면서 내 머리조차 열기로 채워졌다. 물을 따라냈다. 검은 숯이 큰 냄비 바닥을 점령하듯 눌어붙었다. 더불어 내 가슴도 검게 눌어붙는다. 다시 물을 붓고 쇠 수세미로 박박 문질렀다. 어림없다. 쇠 수세미는 바닥에 상처를 낸다며 사용하지 말라는 뱃살공주의 엄명을 잊었다. 정신이 아득하고 하얗게 변해갔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한편으로 본능처럼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내 반성했다.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간은 실수에 대항하는 법이 따로 있다. 잘못을 인정하며 다시는 이따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대에게 강력한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이다. 실수에 변명으로 일관하려는 인간은 평생 그렇게 살 팔자다. 그래서 자인하는 실수나 실패자를 일러 ‘결백한 실패자(Good Loser)'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고, 미래도 그러할지다.      

냄바를 태우다. 시걱적으로 거북할 수 있는 사진을 올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최대한 어둡게 처리해였다


각설, 과정이야 말할 나위 없이 결론은 냄비를 태워 먹었다. 집안이 음식 탄 냄새로 가득했다. 내방 공기청정기가 붉게 빛나며 제 의무를 다하기 시작하였다. 창문을 열었다. 뱃살공주 화난 얼굴이 창문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싱크대 후드까지 돌렸다. 안방 창문도 열었다. 화장실도 활짝 열어 환풍기를 돌렸다. 집에 냥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올려다본다.      


‘이놈들아 냄비가 타면 말 좀 하지.’

요즘에는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진다. 최근 들어 한두 번이 아니다. 앞으로 불을 켠 채 가스레인지 앞을 떠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도 이내 잊어버리면 소용없다. 그렇다고 어찌 세월을 탓하랴!     



벽시계를 봤다. 뱃살공주 귀가 시간이 코앞이다. 집안에 냄새는 어느 정도 빠진 듯하여 뱃살공주의 영역 안방 베란다 창문은 닫았다. 서둘러 화장실과 싱크대 후드도 껐다. 내방 창문만 열어둔 상태에서 끓는 물을 붓고 닦기 시작하였다. 찌꺼기만 떨어졌을 뿐 바닥에 두텁게 눌어붙은 검붉은 자국이 한땀 한땀 피로 그린 문신처럼 선명하다.


이때다. 우리 집 현관문이 열렸다는 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몸의 피가 질량을 높이며 머리로 쏠리자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목덜미가 뻣뻣해져 옴은 느꼈다. 다리에서 쥐가 나는 듯하다.      


나무관세음보살! 아멘! 성부와성자와성신의 이름으로! 알 함두릴라! 옴마니반메홈!

(계속)     




* 다음 주 목요일 : ‘냉전과 휴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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