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프리드리히 니체
어느 책에 인용된 이 구절을 보자마자 뜨끔했다. ‘직장인이었던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싫다’를 되뇌며 꾸역꾸역 출근하고, ‘퇴근하고 싶다’를 주문처럼 외며 8시간을 책상 앞에 버티듯 앉아있었다. 퇴근 후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 따위의 소모적인 생각만 가득했던 나날, 니체의 말 그대로 나는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노예’였다.
그런 내게 갑자기 하루 24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심지어 연금 복권처럼 쓰면 채워지고, 쓰면 또 채워진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지금의 나는 과연 니체가 말하는 자유인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직장의 노예를 벗어났지만 자유인은 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열심히 콤플렉스’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하는 최선을 다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최선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해야 최선일까, 서울 최상위권 대학에 가야 최선을 다한 걸까, 대기업 입사 정도 해야 최선일까', '이들 중 하나도 이루지 못했으니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걸까', 늘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죄책감과 자괴감이 따라왔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더 노력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자괴감. 이것이 내가 가진 ‘열심히 콤플렉스’다.
제주에서는 잠시 멈추기로 마음먹었기에 그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열심히 콤플렉스’가 또 발동이 걸렸다. 요즘 들어 부쩍 ‘이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나? 남들은 더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도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제주살이 초반, 나는 24시간이라는 텅 빈 자유가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그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루틴을 만들었다. 매일 비슷한 시각에 정해놓은 일과를 하며 제주살이에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제 계절이 바뀌어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간밤에도 기온이 높아 선잠을 자는 날이 많아지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늦잠을 잔다. 오전 8시만 되어도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아침 운동을 포기하는 날이 많아졌다. 루틴이 무너지고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무기력해지는 날이 잦아졌다.
루틴을 수정해야 하나 고민하는 한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제주살이의 목적은 ‘여유로운 시간 속에 나를 깊이 들여다보며 삶의 방향을 찾는 것’이었다. 하루 루틴에 짜 넣은 운동, 글쓰기, 독서, 공부, 여행 등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루틴에 집착한 나머지 본래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꿈꾸던 제주살이가 행복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직장의 노예를 탈피해 이제는 스스로를 루틴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난 다음날, 나는 제주살이의 본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여유를 내어보기로 했다. 짐을 싸 들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텐트 앞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풀벌레와 개구리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기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날,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빗소리의 소란함에 다른 소리는 먹먹해지고 이내 세상이 고요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 오는 날이 싫어졌다. 지하철에 사람은 더 붐비고, 축축하고 꿉꿉한 공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오늘 혼자 가만히 빗소리를 들으니 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비 오는 날이 다시 좋아졌다.'
그날만큼은 ‘열심히’의 강박에서 벗어나 눈앞에 주어진 것을 즐기고 잊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루틴은 지키지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을 누리며 나를 들여다보는 하루에 충실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열심히 산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말한 노예란, 단순히 몸이 회사에 묶여 있다든가 하는 물리적인 조건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타인의 요구에 휘둘려 자기 삶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즉,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갖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기준 속에 스스로를 맞추며 살고 있지 않나. SNS에는 ‘성공한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 ‘성공을 만드는 노력’과 같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그런 글들을 보면 내 노력은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노력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더 이상 열심히‘만’ 사는 노예로 살지 않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혼란을 겪어내며 나만의 중심을 찾아야겠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나만의 리듬에 맞춰, 내가 정한 기준으로 열심히 살아가기로 했다.